백년전쟁이 막 시작되었던 1347년, 영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였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칼레 사람들은 1년여간 영국군에게 대항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칼레의 시민들에게 대신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졌다.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왔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후에 이 이야기는 기본 역사적 사실보다 애국적인 성향에 따라 많은 부분 왜곡되고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되었다.
그러나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로마제국에서도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이들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다르다는게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1880년대 프랑스는 민족주의에 입각한 역사적 영웅들을 부각하려했다.
이에 칼레 시민들은 로댕에 백년전쟁 당시 희생을 자처한 6명의 시민들의 조각상 작품을 의뢰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의도와 달리 로댕이 만든 작품에서 6인의 시민들의 모습은 기대했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조각의 위치도 낮게하여 일반 관객들이 영웅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칼레 시민들은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로댕은 이 조각을 통해 근대 조각의 시작을 알렸다.
사진: 칼레시 광장에 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