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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 뜻을 실천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주위에는 사회에서 번돈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업인들이 많다.
가진 자들(haves)과 없는 자들(have-nots)사이에 반목이 깊어가는 풍조 속에서 그러한 생각을 가진 기업인들이 늘어나고, 그러한 기업들을 칭송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사회적 정서이다. 그러한 기업인들을 남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강요하다시피 해서는 안된다. 일정한 규칙을 지켜가며 경영을 하고, 그 결과 정당한 이윤을 창출하고, 그 이윤을 재투자한다면, 기업이 사회에 기부금을 내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우리 사회가 투자액만큼 지분을 소유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주식회사 형태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을 고용해서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많은 세금을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다. 청빈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부[淸富]가 박수를 받는 사회는 훌륭한 사회다.
정상적 기업활동을 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만으로도 기업은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기부금의 95퍼센트는 기업에서 오는 돈이다. 미국과는 완전히 반대다. 미국의 대학은 기부금의 95퍼센트가 개인들의 통장에서 들어온다.
우리나라는 개인들이 기부에 익숙하지 않은 반면, 미국은 기업들이 기부를 하지 않는 편이다.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경영자로서는 비영리단체에 대한 기부를 꺼릴 수밖에 없고, 사외 이사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은 탓이다.
우리나라 대학들도 점차 개인 기부를 늘리는 방향으로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할 것이다. 기업들로부터 기부를 받다 보면 아무래도 비판 기능이 무뎌지고, 기업들의 연구 용역을 수행하다 보면 교육이라는 본연의 의무가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기업들이 비난 여론을 희석하기 위하여 거액을 기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의도의 비순수성 때문에 흔쾌하게 찬사를 보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성공한 기업은 박애를 낳는다는 알프레드 마샬의 ‘경제적 기사도(economic chivalry)’ 정신을 믿고 싶다.
1840년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국의 공업도시 맨체스터에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nei)]을 기초하고 있을 무렵 런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마샬은, 부자들에게 저축과 투자와 기부 같은 건전한 행위를 통해 부를 사용하라고 조언했다.
마샬이 활동하던 대영제국의 전성기 -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를 만든 빅토리아 시대에 기업인들은 벌써 빈자들을 곤경에서 구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사회통합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요즘 논의되는 사회안전망 제도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그는 경제학자들에게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cool head and warm heart)’ 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 를 제공하려는 목표는 기업의 윤리와, 경제학자들의 아이디어라는 두 가지 수단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