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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靑馬) 유치환과 여류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와의 사랑은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플라토닉 사랑으로 세간에 맑은 물방울처럼 적적(寂寂)히 남아있다.
유치환은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고, 통영에서 자랐다. 부산 동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중퇴 후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했다.
1937년 문예동인지〈생리 生理〉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정운 이영도는 경북 청도에서 군수를 지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21세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남편과 사별하였다.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하였다.
1년 후 국어교사로 부임한 청마 유치환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서른 여덟의 청마는 스물 아홉의 청상과부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그 후 유치환은 1947년부터 196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수천통의 편지를 이영도에게 보냈다.
유치환이 연서를 보내기 시작한 3년, 드디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져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당시 전통적인 유교적 윤리에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하였다. 처자가 있는 청마로서는 그녀와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사랑은 더욱 종이위에서만 애절하게 간구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었고 시로 승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스무해동안 청마는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부산여상 교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1967년 2월 13일 저녁 예총일로 문인들과 어울렸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시내버스에 치여 59세의 나이에 붓을 영영 놓게 된다.
청마가 정운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는 20년 동안 수천통이었다. 6.25전쟁통에 이전 것은 불타버렸고 그 이후 것만 5,000여 통이 남았다. 청마 사후 이 편지가 우연히 <주간한국>에 소개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되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면서, 자칫 문단에서 퇴출될 뻔한 위기도 겪었으나 올곧게 살았기에 문단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정운 이영도는 그 중 200통을 추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라는 서간집으로 출판하였다. 이책은 예상을 넘고 25,000부가 팔리게 되었다.
그 후 정운 이영도가 갑자기 죽자, 이 인세로 ‘정운시조상(丁芸時調賞)’ 이 설립되었다.
이영도는 1916년 경북 청도에서 군수를 지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5년 시월간지 죽순에 ‘제야’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훗날 한국여류문인협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영도는 남편의 죽음 뒤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청마의 돌연사로 큰 좌절을 겪었고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살다가 1976년 뇌출혈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나이였던 59세였다.
감각적인 사랑, 피부적인 사랑, 조건있는 사랑이 넘치는 현실속에서,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은 불멸의 사랑으로 소중하고 행복한 사랑 즉 주는 사랑의 불씨를 남겨놓았다.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을 보면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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