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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
2005년 나는 대학의 자율성 문제를 놓고 여권과 다시 한번 대립돼야 했다. 2005년 서울대가 통합논술을 실시하겠다고 하자, 전선(戰線)이 노 대통령을 포함한 전체 여권으로 확대됐다. 통합논술은 입시생들의 수업능력과 성취도를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어 변별력을 높일 수 있는 제도다.
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독서를 하도록 유도하여 단순 암기식 입시위주의 기형적인 교육제도의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제도다. 그런데도 '본고사 실시 반대' 조항에 저촉된다는 것이 나에 대한 선전포고의 이유였다.
나는 논리적인 반대의견에는 얼마든지 대답하고 설득에 나설 뜻이 있었다. 그러나 일부 여권 핵심인사들의 발언은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고사하고, 저잣거리에서도 듣기 어려운 막말 수준이었다. 나는 이 문제야말로 내 직책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관철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임기를 채우는 것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이것은 대학의 존립을 위해 도저히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관철하지 못한다면 내가 총장직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것을 위해 직을 던진다면 나를 지지했던 분들도 임기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탓하지 않을 성싶었다. 그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서리 체제로 가다가 후임 총장을 선출해도 업무의 인수인계는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정면으로 맞서자 불을 켜고 나의 과거사와 개인적 흡집을 뒤지던 여권은 별것을 못 찾았던지 마침내 눈을 슬그머니 감아 주었다.
스태프들은 잘된 일이라며 마음고생을 한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그때 이미 현 정권이 쏟아 놓은 여러 가지 정책에 적지 않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2년 반 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다. 총장이 되고 6개월 가까이 지나, 이제 막 달리는 말에 가속도가 붙을 즈음이었다.
노 대통령이야말로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뜯어 고치고 사회전반을 혁신할 적임자라고 기대하고 있던 나는, 발언 기회가 주어지면 내 구상을 거침없이 피력하겠다는 각오로 그 자리에 나갔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면담에서 나는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그것을 세세히 밝히는 것은 국가지도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
미국의 경제 수도 뉴욕과 정치 수도 워싱턴은 아주 가깝다. 가까운 거리 이상으로 상호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 부시든 콜린 파월이든 한마디만 하면 미국 경제는 물론 우리 경제에까지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다. 그만큼 국제정치는 국내경제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자주외교' 한다고 하는데, 그건 옳은 방향이 아니라고 본다. 어느 누가 자주를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자존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하다.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속으로 경계하는 것은 좋지만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실용외교를 해야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아직도 남아 있는 낡은 틀은 과감히 깨버리고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반면에 남북한 문제든 한미 간의 문제든, 국제문제는 생존을 우선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정은 개혁 드라이브를 강화하고, 외교는 보수적으로 실용노선을 추구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내 말이 메아리도 없이 허공에 흩어지고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