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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 쌍령 전투 - 4만 조선군, 청나라 300명에 당한 치욕의 전투(제1부)

우리 민족역사 3대 패전 중 하나

 

리더를 잘못 임명하거나 뽑으면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되고 국민이 참혹한 곤경에 빠진다는 교훈을 남겨

 

병자호란은 군사전략상 조선의 완벽한 패배

 

병자호란 때 일어난 쌍령전투는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전투 중 하나이다. 쌍령전투(雙嶺戰鬪)는 병자호란이 진행되던 중 1637년 1월 3일에 경기도 쌍령에서 벌어졌던 조선군과 청(淸)군의 전투이다.

 

우리 민족역사 3대 패전(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병자호란 당시의 동북아 국제정세>

한반도 5천년 역사의 특징은 중국대륙에서 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그 충격파가 직접적으로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문헌상으로 한국 역사의 기원인 고조선 때부터 가깝게는 6.25 한국 전쟁까지 예외가 없었다.

 

 

1600년대 초 명나라는 277년의 국운이 다해 쇄잔해가고 있었다. 내부 정정의 혼란, 잦은 지방의 반란 등이 이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이 풍전등화에 닥치자 구원군을 보내어 일본을 물리쳤으나 재정은 파탄 지경이 되어 국력이 크게 소모되어 말기 상황을 나타내고 있었다.

 

명(明)이 허약해진 틈을 타 당시 야만족으로 멸시 받던 여진 부족 중에서 영민한 누르하치가 명나라 영토인 만주 벌판에서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을 하나씩 정복하여 통합하고 있었다. 여진족 부족의 통합을 마친 누루하치는 1616년 정식으로 나라를 설립하고 후금(後金)이라 칭했다. 만주 벌판을 통일한 여진족의 다음 목표는 명(明)이었다.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었다.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조선은 여진족을 북방 미개한 민족 정도로 얕보았다. 그러나 사실 여진족은 이미 11세기에 대금제국(大金帝國; 1115-1234)을 세워 당시 송나라를 양자강 부근까지 밀어부쳐 벌벌 떨게 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후금(이하에선 편의상 청淸이라 칭한다)이 중국을 넘보던 1600년대 초 중국 대륙의 천하지세는 이미 청쪽으로 기울어졌다. 청은 명을 정복하기 위해 친명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배후의 조선을 먼저 정벌하여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당시 지리상으로 청은 만주에서 융성하여 요동-산해관-북경선을 잇는 남진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을 지원하고 있는 배후의 조선을 먼저 정벌하는 것은 청의 당연한 군사전략이었다.

 

청은 1차로 1927년 3만 대군을 보내 조선을 공격하였다(정묘호란). 조선은 패배했으나 일방적 패배는 아니었고, 명나라 침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청은 배후의 조선과 장기전을 할 형편이 안되었다. 이에 청이 먼저 화의를 요청하여 청과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청의 군대는 물러갔다.

 

사진: 누르하치가 사신을 접견하는 장면.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은 다시 친명정책을 계속하였다. 조선이 청의 1차 침입을 겪고도 친명 정책을 유지한 것은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이 불과 한 세대 전인 임진왜란(1592-1598) 때 명나라의 도움으로 일본을 물리친 은혜를 중시하여 실리보다 명분을 중요시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 지식인인 사대부들은 후금을 세운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비하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금을 무시하고 야만족으로 보았으며 대수롭지 않게 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당시 사대부들은 조선 초기에 여진족들이 조선을 형님의 나라로 섬기고 매년 조공을 바치기까지 했던 과거의 대 여진족 우월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1636년 청태종(淸太宗)이 칭제(稱帝)를 선언하고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다. 조선 조정은 사신의 접견 거부는 물론 일부 강경파는 미개족인 여진이 황제를 칭한다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며 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굴욕적인 대접을 받은 청은 그 이후 청태종의 황제 즉위식에서도 조선 사신이 참석은 하였으나 청태종에게 배례(拜禮)하지 않는 것을 보고 조선의 태도에 심한 의구심을 품었다.

 

청은 이후 수차례에 걸쳐 조선이 친명정책을 버릴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청은 조선의 이러한 일련의 무례한 태도들을 조선이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다는 것으로 확인하고 명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병자호란>

1636년(인조 16년) 12월 2일, 청태종은 다시 12만 군사를 보내 조선 정벌에 나선다(병자호란). 청이 동원한 군사는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漢)군 2만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 들은 비우고 견고한 성안에서 적을 맞아 싸운다)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侵攻路) 주변의 성(城)에 군사를 집결시켜 공성전(攻城戰)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체화 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이었으며,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피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의 전략은 조선의 허를 찌른다.

 

신속한 기동력을 자랑하는 기병을 중심으로 한양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청은 성안으로 들어가 적이 공격해 오길 기다리며 수성 전략을 펴고 있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을 외면하고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압록강 의주의 백마산성에서 단단한 준비를 하고 적을 기다리던 임경업(林慶業)은 전투한번 해보지 못하였다. 당시 청군은 그 진격 속도가 매우 신속했으므로, 전국 각지에서 청군은 신출귀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은 한세대전의 보병 위주였던 임진란 때의 경험만을 살려 공성전을 예상한 것이다. 기병으로 이루어진 청군의 전법이 다른 것을 깨닫지 못했다. 청은 개전 시기도 추위에 강한 북방 민족답게 겨울을 선택했다.

 

12월 초(양력으로는 다음해 정월 중순) 강은 이미 얼어 있어 따로 도하를 위한 작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그냥 건너면 됐다.

 

조선의 정보 전달 체계도 안일한 관리들의 태만으로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당시 긴급 통신체계는 봉화이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 12월 6일 첫 봉화가 올랐으나 중도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청이 압록강을 넘은 것은 12월 9일이었다.

 

당시 임진강 이북의 방어 책임자인 김자점(金自點)은 평소에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싫어했다. 큰일도 아닌데 봉화를 올려 조정을 불안하게 할 우려가 있다면서 평소에도 봉화를 올리는 관리들을 징벌하겠다고 압박하였다. 따라서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하는 관리와 병사는 정작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 청나라 침공을 알리는 봉화를 중도에 차단하여 버렸다.

 

{이 부분은 산성일기(山城日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자점(金自點)이 도원수(都元帥) 되어 이로되 도적이 반드시 오지 아니리라 하고, 사람이 혹 도적이 오리라 하면 대로(大怒) 하고 성 지킬 군사를 하나도 더 정치 아니코 의주(義州) 저 편 용골산(龍骨山) 봉화(烽火)를 서울 가져가면 소동(騷動) 하리라 하여 도원수 (都元帥) 있는 정방산성 (正方山城)까지 오게 정하였더니….}

 

사진: 산성일기 원본.

 

그리하여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봉화를 올릴 형편이 되지 못하였고, 관찰사나 병사(兵使)들이 올리는 장계(狀啓)는 도중에 청군에게 빼앗겼다.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6일이 지난 12월 13일(양력 1637년 1월 8일)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청군은 개성을 지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조선왕조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播遷)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상(왕)이 삼공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적이 이미 깊이 들어왔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적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급보를 접한 조정과 임금 인조는 급히 다음날인 12월 14일 한양을 탈출하기로 한다. 12월 14일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자들을 먼저 강화도로 피란케하고, 인조는 창황히 대궐을 떠나 오후에 남대문으로 나와 강화도로 향하려고 했으나 오랑캐 장수 마부대의 군사가 이미 홍제원에 이르렀으므로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남대문 문루에 올랐다.

 

도성 안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가운데 울음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최명길이 홍제원에 나아가 마부대에게 출병의 이유를 묻는 사이에 인조의 수레는 수구문을 빠져나와 밤 늦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군사는 도성과 지방군사가 합해서 1만 2천여명, 문.무관이 2백여명, 종실 등 2백여명, 호종 관원이 이끌고 온 노복이 3백여명이었다. 성안의 창고에는 피잡곡이 1만 6천여 섬으로 만여명의 군사의 한달 양식이 있었다.

 

이것은 일찍이 수어사 이서가 갖은 애를 써서 비축한 군량미였는데 그가 병으로 물러나자, 광주목사 한명욱이 양식을 산성 안으로 들이는 것은 민폐라 하여 갑사창을 한강가에 지어 양식을 저장해 놓았는데 모두 적병이 차지했다. 한 달 남짓한 군량으로 조선은 항전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에 밀지를 보내 구원군을 파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에서 출병한 구원군이 중도에 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뒤늦게 청군의 뒤를 쫓아 남하하였으나 청의 후방 매복병에 패퇴하였다.

 

12월 16일 청군은 산성을 포위하였다. 전투 상황이 마지막 국면이라는 보고를 받은 청태종 누르하치는 12월 29일 친히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만주의 심양을 떠나 한양에 도달하였다. 1937년 1월 1일 청태종은 탄천에 30만의 군사로 진을 치고 동성의 망월봉에 올라 산성안을 살펴보면서 공성 작전을 진두 지휘한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판교와 광주 쪽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은 차단하였다.

 

(8월호에 제2부 쌍령 전투 본편이 계속됩니다; nc한국인뉴스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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