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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 쌍령 전투: 4만 조선군, 청나라 300명에 당한 치욕의 전투(제2부)

<쌍령리 전투>

1637년 (丁丑) 1월 2일 경상도 구원군 쌍령(雙嶺)에 도착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는 왕 인조를 구하기 위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에서 구원병이 출병하였으나 중도에 청군에 의해 차단되어 남한 산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마지막 희망은 경상도에서 출병하는 구원군밖에 없었다. 경상감사 심연은 12월 19일 조정의 밀명을 받고 경상 각지에서 4만여의 군졸을 모아 남한산성의 인조를 지원하기 위해 12월 24일 출발하였다.

 

경상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선봉 부대 병력 40,000여명은 전통적 영남대로를 따라 여주, 이천을 거쳐 1월 2일에 쌍령고개에 이르렀다.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이었다. 본진 1,000명은 심연이 맡아 후방 100여리에 뒤따랐다.

 

 

1637년 1월 3일 전투개시 한편 청은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병사들을 저지하려고 남한산성 남쪽 불당리에 6천여 명의 군사를 매복시켰다.

 

청군은 척후병으로 칼과 창을 주 무기로 한 기병대 3백 기(騎)를 쌍령에 정탐보냈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당시보다 훨씬 개량된 조총 1정씩을 보유하고 있었다. 4만 명의 조총수 앞에 300여 기의 기병은 말 그대로 아예 상대가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300여 청군 척후병이 조선군을 내리 덥친 것이었다. 당시 조선 군졸들의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급작스레 징집되어 제대로 군장도 갗추지 못했다.

 

게다가 혹한에 강행군을 하여 사기도 충천하지 못했다. 반면 청군은 연전연승으로 사기도 높았고, 무엇보다도 북방 민족으로 혹독한 추위에 강했다. 조선군은 2만씩 나누어 경상우병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경상좌병사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치고 목책으로 둘렀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 후기의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긍익李肯翊1736~1806 저술)에 따르면 이때 조선군에 지급된 화약은 2냥이라고 되어 있다. 2냥이면 대략 1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 아직 조총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한 군사들에게 많은 양의 화약을 지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수들 역시 전투 경험이 없어 실제 전투에서 필요한 적정한 량의 화약 배분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후에 전투에서 패배하는 핵심 요인이 되었다. 진지를 구축한 좌병사 허완은 정포수(精砲手; 일등 사수)를 뽑아서 자신이 있는 본부에 배치하여 스스로를 호위하도록 배치했다.

 

 

중등과 하등 포수는 진지 밖에 몰아 진격하는 적을 상대하도록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투를 모르는 하급 전술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초관(哨官; 현재의 중대장) 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지탱하지 못하면 가운데가 홀로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완이 듣고 말하기를, “1등 포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즉 1등 포수는 지휘부가 있는 본부를 지키위 위해 배치하여 본인의 호위만 배려한 것이다. 허완은 그만큼 겁이 많았다.

 

{허완의 인물에 대해선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조선군이 진을 친 뒤 소수의 청군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진 조선군에 먼저 공격을 가했다. 해가 뜬후 청나라 병사가 높은 산봉우리에 적기를 세우고 내려 왔다. 청군의 한 병사가 병기를 들지 않고 단지 목방패와 기휘만 들고 앞서고, 그 뒤에 무기를 든 병사 2-3명, 또 그 뒤로 5-6명, 또 그 뒤로 10여명이 뒤따라 모두 33명이 조선군을 향해 돌진하였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던 청군이 낮은 곳에 있던 조선군을 내리 덮쳤다. 이에 조선군이 일제 사격을 가하자 청군 1명이 즉사하였다. 이에 청군은 조선군의 사정권 밖인 100미터 가량 후방으로 후퇴하여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조선군은 겁에 질렸고, 숙련도도 낮아 사정 거리도 감안하지 않은 채 연달아 함부로 쏘아 대었다. 그리하여 지급된 2냥의 화약을 고스란히 다 소진하여 버렸다.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청군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들고 남산 윗봉우리에서부터 물고기를 꿴 것처럼 줄줄이 공격해 왔다”}

 

이에 군졸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치고 또 정포수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선군이 소리를 지르며 혼란에 빠진 소리를 듣고 청군은 조선군의 화약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그 즉시 일단 후퇴한 청군은 재차 돌격을 감행하였다.

 

목책을 뛰어 넘는 청군 앞에 탁약이 다 떨어진 조선군의 조총은 막대기와 같았다. 청군의 기병들은 막대기 같은 조총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조선 군졸들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조선군은 대 혼란에 빠졌고 서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허완이 이끄는 좌군은 청군 33명에 의해 완벽히 궤멸되었다. 이어 청군은 승세를 몰아 뒤 따르던 기병과 함께 300여명으로 민영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오른쪽에 포진한 민영의 경상우병군은 진을 정돈하고 기다리다가 일제 사격을 하여 적의 1차 돌격을 저지했다.

 

이쪽은 허완과는 달리 군기가 잘 서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탄약을 2냥만 지급한 탓에 탄약은 금방 떨어졌고, 군졸들은 탄약을 달라고 아우성댔다. 급박한 상황에 탄약을 나누어주는 군졸이 허둥지둥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 불을 붙게 하는 데 쓰는 노끈)을 쌓여 있는 화약 더미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 화약이 대폭발하고 탄약을 보급하던 감분수령(監分守令) 2명과 군사 수십명이 폭사했다. 이에 병사들은 일제히 동요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청나라 기병들이 돌격했다.

 

이 과정에서 경상우병사 민영이 전사했다. 조선군은 별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 허둥지둥 퇴각하느라 많은 군졸들이 대량 압사로 괴멸되었다. 조선군은 병력 규모로 보아 좁은 지역에 아주 높은 밀도로 밀집해 있었던 것이다.

 

평지가 아니라 산지 사이의 완만한 구릉과 약간의 급경사가 뒤섞인 지형에서 병력들이 일제히 도주를 시도하다 압사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목책을 넘기 전에 넘어졌다 뒤에서 밀어닥치는 병력들에 의해 1차 압사 사고가 벌어졌고, 요행히 목책을 넘은 병사들은 목책 밖의 경사지역에서 추락사를 했으며, 추락사를 한 시체가 쌓여서 목책 높이와 비슷해지자 목책을 넘어 탈출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만 단위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좁고 경사진 지역에서 밀집한 상태에서 발생한 대형 압사 사고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너진 조선군 위로 청병이 칼과 창으로 닥치는데로 조선군을 죽였다.

 

{연려실기술은 당시 현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안동 영장(安東營將; 안동 주둔군 사령관) 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당하여 손수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신지(信地)에 우뚝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다.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 군졸이 붕궤(崩潰)되어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

 

 지휘관이 도주하는 병력에 밟혀 죽을 정도면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남급이 쓴 병자일기(丙子日記)에선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에 도달했으나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목책 밖이 험준해 추락해서 죽었다.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 "죽은 시체가 계속 쌓이면서 마지막으로 넘은 자는 살아났다"}

 

{연려실기술은 이날의 전투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적이 양진을 깨뜨리고 나자 죽은 자의 옷을 벗기고 또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처음에 선약해가 남산 위에 진을 옮기자고 세 번 청하였으나 민완이 끝내 듣지 않아서 마침내 적 3백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한다."}

 

한편 경상감사 심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군 본진은 여주 영릉 부근 (남한산성으로부터 100여 리)까지 왔다가 선봉부대의 패전 소식을 듣고 전의를 잃고 조령 방면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팔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게 격파당하여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근왕군은 더 조직되지 못하였다.

 

***조선군과 청군의 병력 수에 대한 논란:

 

<조선군의 병력>

쌍령전투 당시 조선군의 병력에 대해 논란이 많다. 과연 4만명을 동원할 수 있었는가와 과연 4만명이 단 300명의 청군에 괴멸당할 수가 있었느냐의 논란이다. 이에 대해 당시 몇몇 사료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제일 먼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허완과 민영이 어영군 8,000과 경상도 본진을 이끌고 이동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경상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인솔하는 병력이 총 4만이라고 밝히고 있다.

 

.병자록에서는 경상 좌병사와 우병사의 병력을 합쳐 총병력이 4만여 명이라고 기술하여 연려실기술과 일치한다. 병자록은 병자호란 당시 형조참의를 지냈던 나만갑의 저술이다. 나만갑은 국왕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 농성전에 참여한 인물이란 점에서 그가 일기체로 남긴 병자록은 병자호란에 관한 한 상당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는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다.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양金時讓의 시문집.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또 그 당시의 사회적인 사건의 내용을 싣고 있다)은 당시 경상 좌병사 허완, 경상 우병사 민영, 충청병사 이의배 등이 거느린 군대가 총 3만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허완과 민영의 직속 상관이었던 심연의 묘갈명(墓碣銘;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에 새기는 글)에는 심연의 직할병력, 즉 본진 병력의 규모는 1000여명 수준이라고 적고 있다. 이어 허완과 민영이 1월 2일 쌍령에 도달하기 직전에 지휘하던 병력의 총 규모는 3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三萬有餘)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려실기술, 심연의 묘갈명, 하담파적록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의 병력 규모는 대략 3만명을 넘었다는 점에 신빙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청군의 병력>

 .청군의 병력에 대해 <병자남한일기>가 "경상 좌병사진은 청군 기병 선봉 30명, 경상우병사진은 청군 기병 300명에게 사실상 전멸되었다"고 기록했다.

 

.연려실기술은 당시 출전한 청군 총병력은 기병 300여명, 좌병사의 진을 공격할 때 선봉으로 돌격한 청나라 군대는 33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승정원 일기(조선 왕조의 왕명 출납, 행정 사무 등을 매일 기록한 일기)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미 청은 수천기를 끌어와 허완의 진을 침범했다. 허완은 사졸로 하여금 북을 치며 응전하게 하였으니, 총성과 함성이 하늘을 진동했다. 청은 선봉에 선 기병 중 사상자가 많아 이기지 못했고, 허완은 승세를 타고 심양마 수십필을 빼앗았다." 이를 보아 청군이 수천명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중국측 기록을 보면 쌍령전투 해당 날짜인 청태종실록 권33 숭덕2년 1월 3일조를 보면 청군 병력 규모에 대한 언급은 없고, 패륵 岳託이 쌍령에서 조선군을 격파했다고 나온다. 패륵은 대충 6000~75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므로 패륵 岳託이 쌍령전투에 지휘한 청군의 병력 규모도 그 정도 수준(수천명)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의 『皇朝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숭덕 원년 12월 을묘일, 패륵(貝勒) 岳託 등으로 하여금 3천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己卯, 遣貝勒岳託等, 以兵三千濟師)" 卷 293 따라서 남한산성을 포위할 때까지의 岳託의 군사는 3천을 육박했다고 볼수있다.

 

<종합 검토>

 .남급본 <병자일기>에는 조선군이 쌍령에 도착한 시점부터 청군 척후가 조선군을 둘러 쌌는데 아군이 이를 몰랐다고 되어 있다. (賊之斥候已環於我軍而不知也). 척후가 이미 조선군을 둘러쌀 정도면 척후만도 상당한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쌍령전투에서 묘사된 상황 정도의 대규모 압사 사고를 일으킬 정도라면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느낄 정도의 병력이라면 적어도 수천 명 이상의 청군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대한민국 국방전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병자호란사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상략) 1월 3일 청군은 6천명을 동원하여 대쌍령의 경상도 근왕병 진영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략) 청군은 2천명의 병력을 좌, 우 양쪽에 배치하여 우병사의 진영을 공격하는 듯한 양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우병사를 견제한 청군은 4천명의 병력을 집중 투입하여 좌병사에 대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 p. 208

 

<다음 9월호에 쌍령전투 패배 원인 및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모습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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