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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쌍령 전투 - 4만 조선군, 청나라 300명에 당한 치욕의 전투(제3부, 끝)

<쌍령전투 패배 원인>

 

쌍령 전투에서 조선은 전략상은 물론 전술상에서도 완벽히 패배했다.

전투 현장에서도 청군의 전술을 예상하지 못했다. 조선군은 당초 청군이 도로를 따라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는 도로 양편 산과 산 사이의 대쌍령고개로 진군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조선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대쌍령고개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 산등성이로 올라가 산 정상에서 산 아래로 공격하였다. 이 방향은 조선군이 예상한 주공격 방향이 아니었으므로, 목책 높이도 그리 높지 않았다. 따라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공격하는 청군은 손쉽게 목책을 돌파했다.

 

또한 당시 전장에서 당연시 되어온 적의 동태를 점탐하기 위한 척후병도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앞의 적의 배치나 병력, 동향 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졸 동원에도 조급함을 참지 못해 준비 부족한 상태에서 출정하였다.

 

급보가 경상도에 전해진 것은 1636년 12월 19일(이하 음력) 이었고, 당일에 경상도 각 지방에 병력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경남 우병산(경남 지역 군부 사령관)민영이 12월 23일 어영군 8,000명과 본도(本道) 병마를 이끌고 충주를 통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5일만에 병력을 동원, 경상도를 벗어나 충청도에 진입한 것이니 병력 이동은 매우 신속한 편이었다. 승정원일기에도 경남 좌병사(경남 지역 군 부사령관)허완이 불과 5~6일도 되지 않아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적고 있다.

 

경상도 감영이 위치한 대구에서 충주까지는 3~4일 일정이고 좌우병사가 위치한 진주나 울산에서는 하루 이틀이 더 소요되므로 기록된 대로의 병력 이동 시간이라면 민영과 허완 휘하 병력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집결과 행군 과정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종사관(從事官) 도경유(都慶兪)의 진군 독촉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당시 병력 집결, 행군과정이 정상적이라기보다는 매우 혹독한 조건하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연려실기술의 당시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처음에 심연(경상도 지역 군 사령관)이 전 서윤(庶尹; 조선시대 종사품 벼슬) 도경유(都慶兪)를 종사관(從事官; 조선 시대에, 각 군영의 주장主將을 보좌하던 종육품 벼슬)으로 삼아서 군중의 일을 경유에게 일임하였다.

 

경유가 우병사의 군관 박충겸(朴忠謙)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이고, 너무 급하게 진군하기를 독촉하여 먼 고을의 군사는 반 이상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군량(軍糧)이 후방에 있었으나 부득이 진병하였다. 군졸이 의장(衣裝)을 모두 버리고 입고 있던 홑옷도 짧게 자르고 해가 질 때까지 행군하니, 얼고 굶주려 군사들의 마음이 이미 무너져 쌍령(雙嶺)의 패전 원인이 모두 경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심연의 부대는 급히 출정하느라 경상 각지의 병사를 다 모으지 못하고 우선 모은대로 출발한 다음 후속으로 모은 부대가 당도하길 기다린 후 이들 병력과 함께 쌍령에 1월 2일에 도착하였다. 전국적인 병력 운영면에서도 전략이 전혀 없었다.

 

남한 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전국 지방 수령에게 원군을 파병하도록 밀지를 보냈다. 당시 청군은 제 아무리 용맹한 기병이라고 하더라도 수천리 이역에 원정 나온 군대였을 뿐이다. 따라서 불편하고 불리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군은 이러한 청군의 약점을 이용하지 못했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남한 이남 각도의 지원병 출정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2월 21일; 충청도 원병이 헌릉(獻陵)에 도착하여 화전(火箭)으로 서로 응하였다. 12월 26일; 강원도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이 병사를 거느리고 검단산(儉丹山)에 도착하여 횃불로 상응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의 습격을 받고 패하였다. 12월 27일; 공청 감사(公淸監司; 충남 공주 지역) 정세규(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險川)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즉 조선군은 병력을 한 곳에 집중 시키지 않고 각개 전투 식으로 대적하다가 우세한 적에 패한 것이다. 만일 조선의 병력을 모두 모아 집중하여 적을 공격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칼과 창, 기병으로 싸우던 고대 전투에선 병력의 집중 원리가 전투의 기본원리이었던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원칙이었다.

 

<남한산성에서 버티던 인조 항복>

전쟁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던 경상도 구원군의 허완과 민영의 군대가 궤멸된 상황에서 남한산성을 구원할 군대는 사실상 전무한 상황되었다. 청군은 인근 산마루에서 남한산성을 향해 때때로 홍이포(紅夷砲; 대포의 일종)를 발사하여 돈대(墩臺)와 성첩(城堞)을 파괴하자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게 된다.

 

사진: 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조선 영조때 2문이 주조되었다.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정거리2~5km 유효사정거리 700m 인 전장포이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추위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죽었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조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며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하기 시작했다.

 

{연려실기술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조정 신하 중에 죽은 자가 2, 3인이고 성을 지키는 군사 중에 얼어 죽은 자가 9인이었다.”}

 

‘연려실 기술’,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 ‘양구기사(陽九記事; 작자 미상, 丙子胡亂과 그 후 淸과 강화한 전말을 기록한 책)’ 등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예외 없이 ‘닭다리’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연려실 기술에는 “이때 임금이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자며 밥상에도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으니, 전교하기를,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으니 반드시 이것은 나에게만 바치는 까닭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고 적고 있다.

 

한편 청태종은 인조가 1월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자 봉림대군(후일 효종) 등이 피난해 있는 강화도 공격을 명령한다. 청군은 1월 22일 새벽부터 강화도 상륙을 시도하여 당일 오후에 강화성을 점령하였다. 22일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많은 사람들이 순절하였고 봉림대군, 세자 빈, 재신들은 포로가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40여일을 버티던 인조는 1월 26일 강화도 실함 사실을 접하자 항전의지를 상실했다.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인조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가 출성을 재촉하자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와 삼전도에 단을 쌓고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서 항복의 예를 행한 후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병자 호란 이후>

 

한양은 종로와 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양구기사(陽九記事)에는 “적은 강간•방화•약탈을 수없이 자행하고 있었다” 고 그 참상을 적고 있다.}

 

조선 백성은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 명 이상이 거래되었다.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청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이다.

 

자신에게 조공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을 하는 사실에 조선 왕과 백관(百官)과 명을 떠받들던 식자층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청나라를 쳐서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효종은 심양에서 겪은 인질로서 고초와 굴욕을 분히 여겨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상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과 함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축(修築)하고 군대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청이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대중국(對中國) 지배를 공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였으므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사사로이 북벌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다. 임경업이 명과 연락하여 청을 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한편으론 청의 앞선 문물을 수용하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운동이 일어났다.

<끝> (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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