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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전투에 등장하는 도경유의 평가와 그의 죽음, 그리고 범인을 둘러싼 엇갈린 주장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즉 이긴자가 제 입맛에 맞도록 자신에 유리하게 후세에 남긴다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에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묘사에서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1398년 8월 26자 기록에 “배가 불룩한 사람” 이라는 표현과 태종에게 “살려 주소서” 라고 빌었다는 표현 등이 정도전을 굴욕적 인물로 묘사한 대표적 사례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승자가 아니라도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은 많다.

그래서 ‘역사는 기록을 남긴자의 것이다’ 라는 명제도 성립된다. 그러나 모두가 기록을 남겼을 때 ‘역사는 그것을 평가하는 사가들의 몫이다’ 라는 명제도 성립한다.

 

그 평가는 후세의 사가史家가 한다.

살아 생전에 별 볼일 없었지만 죽어서 세계사를 바꾸고, 유명해진 사람은 수없이 많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전쟁론을 쓴 크라우제 비츠, 주옥같은 청량한 시를 지은 윤동주 등등.

 

죽기전에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 놓는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옛 중국에서는 10년 마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사십자술(四十自述)』이니 『오십자술(五十自述)』이니 혹은 『육십자술(六十自述)』이니 하는 제목의 책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도경유의 평가와 그의 죽음, 그리고 범인을 둘러싼 엇갈린 주장들>

병자호란때 등장하는 엑스트라 정도의 인물 정도인 도경유都慶兪(경상도 병력을 모아 쌍령으로 진군시켰던 책임자)에 대한 평가는 관련자의 기록, 후손들의 기록 등이 서로 다르다.

 

첫째, 연려실기술에서는 쌍령전투의 패인이 몽땅 도경유에 있는 것처럼 다음과 기술하고 있다.

{쌍령雙嶺의 패전 원인이 모두 경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 15년 1637년 5월 21일의 기록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헌부가 아뢰기를, “병란 때 경상 감사 심연(沈演)이 종사관 도경유(都慶兪)를 좌우 병사의 진중에 보내 전투를 독려하게 하였는데, 접전이 시작되자 도경유가 먼저 도주하여 전군을 놀라 무너졌으므로 온 도내의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심연은 사정에 구애되어 즉시 효시(梟示;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메달아 뭇 사람들이 보게함)하지 않았으므로 물정이 분하게 여김이 오랠수록 더욱 격렬합니다. 도경유를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러나 도경유의 후손들이 적은 도경유의 묘비에 쓰여진 묘갈명(墓碣銘; 묘지에 망자의 생전 기록을 적은 글)에는 다음과 같이 그를 훌륭한 충성된 군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병자(丙子 : 1636)년 가을에 모친의 병환으로 휴가(休暇)를 얻어 집에 거류(居留)하시다가 청군(淸軍)들이 경성을 범(犯)하여 임금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드셨다는 소문(所聞)을 듣고는 곧장 단기(單騎)로써 난(難)을 구원(求援)하려 달려가다가 본도백(本道伯) 심연공(沈演公)을 만나 악수(握手) 통곡(痛哭)을 하니, 심공(沈公)이 공의 충의에 북받쳐오르는 감탄(感歎)을 하고는 함께 같이 일을 할 것을 요청(要請)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으로 종사원(從事員)을 삼아 좌우(左右)의 병영(兵營)을 총독(摠督)하고 왕사(王師)를 독전(督戰)케 하였는데, 당시에는 조정에서 행하는 호령(號令)이 제대로 통하지 아니하고 노병(虜兵)들의 성세(聲勢)가 대진(大震)하니 장사(將士)들이 두려워하여, 먼저 오르기를 이롭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공께서는 우영군관(右營軍官) 한 사람을 나포(拿捕)하여 머뭇거리기만 하는 죄(罪)로써 꾸짖고 목을 베어 이를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고 제군(諸軍)을 독전(督戰)하니 즉각 출발(出發)하였다.

정축(丁丑 : 1637)년 정월 3일에 이천(利川)에 도착(到着)하여 쌍영(雙營)에서 적을 만났다. 공께서는 북을 치며 독전(督戰)을 하니 아군(我軍)은 사기(士氣)가 높아 다투어 분발(奮發)하였고 노기(虜騎)들은 지쳐서 쓰러지므로 거의 전승(全勝)을 거둘 뻔하였는데, 문득 우영(右營)의 포약장(暴藥藏)에서 불이 나자 군중(軍中)이 요란(擾亂)하여지니, 드디어 그 틈을 탄 적들에게 패하게 되었다.

 

공께서는 말에서 떨어져 거의 죽을 뻔하다가 오래만에야 겨우 깨어나셨다. 5월에 총군(摠軍)에 실리(失利)하였다는 이유(理由)로 마침내 관리(官吏)들의 의논(議論)에 좇아 평해(平海)로 귀양을 갔다가 되돌아 곧 임금의 유서(宥恕; 용서)를 피몽(被蒙; 받다)하고 양지(陽智)에 이르러 도중에서 돌아가셨으니 이는 반감(反感)을 가진 수자가 해(害)한 것이었다.

 

이 길을 떠나올 때에 어떤 사람이 사사로이 공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중도(中道)에 저격(狙擊)하려는 자가 매복(埋伏)하여 있다는데 어찌하여 다른 길을 택(擇)하여 가지 않으시오?』하였으나, 공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왕사(王事)로써 군법(軍法)을 행하였는데 저들은 사사로운 수원으로써 보복(報復)코저 하니 일이 의리(義理)는 아니지만 이것도 같은 횡역(橫逆)이니 이 또한 어찌 하겠는가? 임금님이 욕(辱)을 보시면 신하는 죽어야 하다는 것은 평일에 익혀 아는 바이다. 지금 만약에 화(禍)를 면하지 못하더라도 이 역시 왕사(王事)이며, 비록 죽은들 무엇이 한이 되리오?』하시며, 끝내 길을 바꾸지 아니하셨는데 마침내 화(禍)를 입게 되었으니, 이로써 가히 공의 심사(心事)를 볼 수 있다.

 

공의 향년(享年) 42세이고, 이해 월 일에 화원(花園) 명곡(椧谷)의 참판공(參判公) 묘하(墓下) 손좌원(巽坐原)에 장례(葬禮)하였으며, 경진(庚辰 : 1640)년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追贈)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상좌병사 허완의 묘갈명(비명碑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에서 20리 떨어진 쌍령(雙嶺)에 이르러 공이 우영(右營)과 약속하여 아침에 사졸들에게 밥을 먹이고 남한산성 아래로 진격하자고 하였다.

 

안부종사(按部從事) 도경유(都敬兪)란 자는 제멋대로 행동하여 평소 군사들의 신망을 잃고 있던 자인데, 그자가 각 군에 독촉하여 아침이 밝기도 전에 병력을 진군시켜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군사들이 멀리서 왔고 차가운 날씨에 춥고 굶주렸으니, 윽박질러 싸우게 한다면 필시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도경유가 그 말을 듣지 않고 먼저 우영 군관(右營軍官)의 목을 베어 군사들에게 겁을 주니, 공이 말하기를,“하늘의 뜻이로다. 대사(大事)는 끝장났도다.” 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오랑캐의 복병(伏兵)들이 크게 일어나 양 군영의 군사들이 모두 패하였다.}

 

연려실기술에 도경유 범인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적이 물러간 뒤에 경유가 서울에서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총탄에 맞아 죽었다. 경유의 집에서는 충겸의 두 아들이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관에 고발하니, 충겸의 두 아들을 체포하여 2년 동안 마침내 의옥(疑獄)으로 석방되었다.}

 

사진: 1625년(인조 3) 도경유가 낙음정사(洛陰精舍)를 지어 수학․강도(講道)하였다. 1675년(숙종 1) 병암서당을 창건하여 후손들의 종회당 겸 후학을 양성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를 1785년(정조 10)에는 도응유(都應兪)와 도경유(都慶兪)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병암서원으로 승호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후 1868년(고종 5)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24년 지역유림과 후손들의 열의로 복원하였다 2000년 대구광역시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서원일대가 완전 재개발을 위한 구획정리가 됨에 따라 옛 서원을 헐고 2001년 8월 23일 재건축 기공식을 갖고 조감도와 같이 공사하여 2003년 5월에 사당, 강당, 동서재 등 목조건물 10여동을 새로 중건하였다. 1924년 중건한 서당은 그 한켠에 아직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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