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nc뉴스

nc한국인사회

교회.종교

세계/한국/미국뉴스

최신건강뉴스

비지니스 아이디어

칼럼

이민

이민

교육

교육

문화/문학/역사/철학

음악/동영상

여행정보

음악

nc한국인뉴스선정동영상

English

English

확대 l 축소

정운찬 칼럼 - 평등사회

자본주의 사회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도 드물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하나같이 한솥밥을 먹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정체성 때문일까. ‘단일민족’이라는 도그마와 평등이라는 이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묶여 있다.

 

분단의 땅 한국이 빠른 속도로 ‘조국 근대화’에 성공한 것도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잠재된 평등사상의 역할이 컸다.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마을마다 울려 퍼졌던 노래의 앞 소절이다.

 

당대의 시대정신에 어울리게 가난을 떨쳐 버리고 부자가 되자는 계몽가요인데, 그 전제는 ‘금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꾸’는 것이며, 결론은 ‘우리도 한번 부귀 형화를 누려 보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 이네올로기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숨 쉴 공간을 허용해 주지 않지만, 앞다투어 부를 추구하는 데는 상당한 추진력(momentum)을 발휘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를 재는 기준은 뭐니 뭐니 해도 ‘남’이다. 그것도 ‘나’와 가장 가까운 ‘남’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도, 나의 것은 정체된 가운데 손쉬운 비교 대상이 소유를 늘리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은 ‘남’ 부끄러운 것이고, 부유한 것은 바로 ‘남’부럽지 않은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그렇게 평등을 부르짖는 한국이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돈을 밝히는 것으로 명성이 난 중국이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러니치고는, 당시의 국내외적 역학관계 속에서 다행스럽게 종결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고 창의성과 수월성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에서까지 평등을 추구하지는 말아야 한다. 세계가 하나의 커뮤니티, 하나의 시장이 된 지금까지 교육의 하향 평등화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평등사회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다가 빈곤의 평등 앞에 두 손을 들고만 북한의 예에서 냉엄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도, 우리나라는 과연 평.등(坪等)사회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 몇 평에서 몇 평으로 아파트를 옮겼다느니, 어디는 몇 평짜리 아파트 시세가 얼마라느니, 상당수 승객은 집의 면적을 화제로 삼아 노곤한 피로를 달래고 있다. 이번에 아들이 몇 등에서 몇 등으로 올랐다느니, 딸은 등수가 떨어져서 차라리 외국으로 보내야겠다느니,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단연 압도적 이야깃거리다.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대려고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자청하는 어머니들에게 자녀들의 성적만큼 중요한 관심사도 드물 것이다. 한참 자동차가 대중화된던 1980년대에는 음주 운전한 것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다, 이제는 골프 타수로 술안주를 삼는 중년 남성들에게도 ‘평’과 ‘등’에 대한 열의는 다른 이들 못지않다. 그것은 이미 남녀노소를 구별 짓지않는 범국민적 현상이 되었다.

 

나 역시 자식들을 키우며 또 이분들의 자녀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평형(坪型)과 등수(等數)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숫자에 집착하는 분들을 대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행복의 지표가 부동산 시세라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고등학교 때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터득한 가장 큰 깨우침은 부자도 걱정거리가 있고,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는, 세상에 공개된 비밀이었다.

 

학교 성적 역시 사람의 가치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아무런 배경 없이 이민자가 성공하는 것이 ‘미국의 꿈(American Dream)’ 이라면,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전형적인 한국적 희망(Korean Dream)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우열을 가릴 수없는 고교 평준화로 학교 수업이 부실해지고, 논술문제를 평이하게 출제하여 돈 들여 수험 테크닉을 익히는 학생과 가난하지만 우수한 학생 사이에 구별이 어렵게 만드는 한, 돈으로 성적을 올리고 학벌로 미래를 보장해 주려는 유혹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돈이 위력을 발휘하기 전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자고 주장하는 이유다.

 

고교 입시를 부활하면 과외가 극심해진다고 우려하는 분들이 있는데, 현재 과외는 더 이상 극심해질 수 없는 지경까지 와 있다. 하루는 24시간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조차도 심지어는 대학 교수에게까지 개인지도를 받는 고등학생이 상당수 있었지 않았던가. 예외는 어느 시대, 어느 여건 아래서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외를 우려하여 정책을 펴지 못한다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