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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칼럼 - 배려가 만드는 기품

농경 시대는 사회 자체가 산 교육장이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아버지에게 누가 될까봐 행동거지를 함부로 하지 못했던 시절, 주위의 손가락질[指彈]은 말 그대로 총알처럼 무서운 사회적 규제방식이었다.

 

그 시대의 가정은 어른들의 경험과 지혜가 자연스럽게 자식들의 몸과 마음으로 스며드는 도량 구실을 했다. 그런 환경이 몸에 밴 어머니는 서울, 그 각박한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새벽 일찍이 바깥 출입을 삼가셨다.

 

분주한 도시의 길 한복판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치면, 그 길을 앞질러 가지 않기 위해 다소곳이 한옆에서 기다리셨다. 배려는 낯모르는 사람이 부닥칠지도 모르는 일까지도 현재 내가 당한 일처럼 지레 짐작하고, 가장 사소해 보이는 것을 가장 중하게 여기는 마음 자세다.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우화도 그런 맥락이었다. 잔칫상처럼 잘 차려진 식탁을 가운데 두고, 손님 같이 보이는 이들이 다투고 있었다. 모든 이들은 굶주림으로 뼈가 앙상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젓가락이 창만큼이나 길어서 입에 음식을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기진 자들은 더욱 살기등등하여 함부로 젓가락 질을 해댔고, 그때마다 옆에 있는 자를 찔러 아귀다툼이 빚어졌다. 옆방 역시 상차림과 젓가락 같은 주어진 여건은 한 치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모두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화기애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그 긴 젓가락으로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음식을 서로 먹여 주고 있었다. 똑같은 젓가락이 한쪽에서는 창처럼 무기의 구실밖에 하지 못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화친의 가교가 되기도 한다. 앞방은 지옥이라고 했고, 그 옆방은 극락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옥이든 천당이든, 그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똑같은 사람을 만나도 누구는 사랑을 하고, 누구는 증오를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마음의 바탕은 예의와 배려다.

 

욕심 앞에서는 예의를 차릴 자리가 없고, 자신만을 내세우면 배려할 틈이 없다. 얼굴을 아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낯모르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낳는 씨앗은 절제와 겸양일 것이다.

 

학은 위를 80퍼센트만 채우고 돼지는 100퍼센트를 채우는데, 사람은 120퍼센트를 먹는다고들 한다. 조금씩 욕심을 줄여서 예의를 차리고 조금씩 양보하며 남을 배려한다면, 상대방도 곧바로 화답하게 될 것이다. “이익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내놓는다(견리사의 견위수명 . 見利思義 見危授命)”는, 결연한 안중근 의사의 인품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단지(斷指)의 맹서 자국이 선명한 유묵은, 그래서 혈서보다 더욱 순결하다. 예의바른 사람에게는 인품이 느껴지고, 배려하는 사람에게는 기품이 깃들어 있다. 힘들여 일한 사람의 구수한 땀 냄새처럼, 우리는 가끔씩 삶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을 본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지만, 굵은 나무는 베어지지 않으면 크게 쓰일 수 없다.

 

향나무는 제 몸을 태워야 비로서 그 몸속에 품고 있는 진정한 가치가 발휘된다.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자신을 이기고 이기심을 극복할 때 스스로 발현되는, 최소한의 사회적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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