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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보로 대학살" vs “그린스보로 총격” 명칭 놓고 시의회 격돌
인종문제에 이념 문제가 덧해져 복잡
< 1979년 그린스보로 메이플 공동묘지에 묻힌 사망자 5인의 묘비의 당시 사진.>
"그린스보로 대학살" 인가? “그린스보로 총격”인가? 35년 전의 사건을 놓고 그 명칭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못해 그린스보로 시의회를 날카롭게 갈라서게 하고 있다.
명칭에 따라 역사적 자리매김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자들이 저지른 학살인가 아니면 미국 사회에 공산주의를 퍼트리게 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marxist) 계급투쟁가들에 대한 반공주의자들의 타격인가.
35년 전 그린스보로 공장지대에서 일어난 사건의 성격은 아직도 논쟁이 되고 있다. 인종문제에 이념 문제가 얽혀 사건의 본질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이 그린스보로 사회를 갈라놓고 있다. 지난 1월 25일 그린스보로시 의회는 회의를 열고 당시 사건의 비碑(marker)를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비의 명칭을 갖고 의견이 갈려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비를 세우는 문제가 한 세대 이상이 지난 오늘날의 시민들의 마음속에도 정리가 되지 않아 다시 한 번 그 날의 비극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碑가 세워지는 장소는 당시 사건이 발생한 윌로우 로드와 맥코넬 로드 교차로 부근이다.
碑에 새겨질 내용은 단 25 단어이다.
“Greensboro Massacre — Ku Klux Klansmen and American Nazi Party members, on Nov. 3, 1979, shot and killed five Communist Workers Party members one-tenth mile north.”
이 碑는 '노스 캐롤라이나 고속도로상의 역사적 碑 설치 자문위원회The North Carolina Highway Historical Marker Advisory Committee' 가 지난 2014년 12월에 만장일치로 사건 발생 장소에 碑를 세우기로 의결하여 추진되고 있다.
碑를 세우는 측은 碑의 이름을 “그린스보로 대학살” 이라고 하려고 하는데 일부 시의원들이 학살이라는 어휘가 적당하지 않다며 그냥 “그린스보로 총격” 이라고 하자고 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비를 세우기 위해 세우는 장소의 해당 지역 시의회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은 법적인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관례적으로 그렇게 해왔다. 지나달 초 이 문제가 논의되자 의견이 너무 감정적이고 격정적으로 치우쳐져 마치 35년 전 사건이 어제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이 논쟁은 역사 그자체에 대한 논쟁이다. 그 사건을 어떻게 역사에 기록해야 하느냐와 어덯게 역사적으로 정리해야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논쟁이 아직도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35년 동안 수많은 조사 보고서, 세번의 재판, 진실과 화합의 긴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누구를 비난해야 하고 하는 문제가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KKK-나치당Ku Klux Klan and the American Nazi Party' 같은 증오 그룹을 편들지 않고있으나, 반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선뜻 '공산노동당Communist Workers Party' 을 목청높여 지지하려고 하지 않는다에 있다.
<사건 개요>
<‘노동자의 관점 기구’단원이 1979년 11월 3일 총격 사건에서 희생된 동료 옆에 무릅을 꿇고 있다.>
1979년 11월 3일 100여 명의 시위자들이 당시 섬유산업의 중심지였던 그린스보로 동쪽 공장지대의 근로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모닝사이드Morningside Homes' 주택단지 앞 길에서 노상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KKK단과 전투를!, 이들과 싸움을!" , "이들에게 죽음을!" 이라고 외쳤다. 시위가 벌어진 '모닝사이드Morningside Homes' 주택단지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첫 공공주택단지이자 주로 흑인 근로자가 살고 있었다. 이때 일련의 승용차 차량 9대가 시위현장에 다가왔다.
<KKK단 멤버가 타고온 차 뒤 트렁크에서 무기를 꺼내 나누어 주고 있다. 바로 직후 이 총격으로 5명의 시위자들이 사망하였다.>
안에는 모두 백인들이 타고 있었고, 일부 차량 앞 번호판에는 KKK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차량은 시위대 사이를 지나가면서 속도를 늦추었고 시위대는 갖고 있던 피켓과 나무 가지로 이들의 차량을 가볍게 쳤다. 그러나 차량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차를 멈추고 내렸다. 바로 이들은 차량 뒤 트렁크에서 소총을 꺼내 시위대에 사격을 가했다.
이 자리에서 시위자 5명이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도착한 경찰에 가해자들은 체포되어 현장에서의 사건을 종료되었다.
세월이 흘러 사건 현장은 불도저로 모두 갈아 업어져 풀만 무성하다. <당시 사건 발생 배경> 이날의 시위를 주도한 단체는 ‘노동자의 관점 조직Workers Viewpoint Organization’ 이라는 단체이었다. 후에 이 단체는 공산노동당(CWP)’으로 전환되었다.
가해자들은 인종주의자들의 조직으로 알려진 KKK와 신 나치당이 결합한 ‘KKK-Nazi’당이었다. 이 사건 발생전부터 두 단체 사이에는 긴장감이 웃돌았다. 서로를 없어져야할 존재로 생각했다. 이날 사태는 경찰과 연방수사국이 정보원을 통해 일부 정보를 갖고 있었으나 이 비극을 막지못했다.
당일 KKK-Nazi당원들은 경찰에 심어 놓은 자신들의 정보원으로 부터 이날 시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시위 현장에 들이 닥쳤다. 이들은 I-85에서 9대의 승용차를 줄 세우고 모닝사이드 주택단지에 진입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장면은 고스란히 보도진의 카메라에 잡혔다.
<피살된자는 대부분 고학력 인텔리 공산주의자들>
당시 사망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당시 사망한 사람들 중 짐 월러 박사는 시카로 대학 의대를 졸업했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기위해 의사 업무를 중단하였다.
사망 당시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다. 또 다른 사망자 마이크 네이탄 박사는 듀크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더램의 링컨 지역 보건 센터에서 소아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저소득층 자녀들을 돌보고 있었다. 제3의 사망자 빌 샘프슨은 하바드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4번 째 사망자 케자 코스는 쿠바에서 온 이민자로 듀크 대학 우등 졸업생이었다. 5번 째 사망자 샌디 닐리 스미스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으로 그린스보로 베네트 대학 학생이었다. 그날 거리에 있었던 사람과 텔레비젼에서 그 사건을 보았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 주의와 전통이 오래된 지금도 가슴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외부 세력 개입 논란>
당시 시위을 조직하고 전개하고 그리고 사건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모무 외부에서 그린스보로에로의 이주자한 사람들이었다. '노스 캐롤라이나 고속도로상의 역사적 碑 설치 자문위원회The North Carolina Highway Historical Marker Advisory Committee' 의 연구 고문인 마이클 힐은 "많은 사람들이 그 날 사건이 외부인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느낍니다" 라고 말했다.
지난 1월 25일 회의에서 그린스보로 시의원 마터니도 "우린 외부에서 그린스보로에 온 의사, 박사들에 대해 대부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가난한 흑인 근로자들을 화나게 하고 조직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들 노동자들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교화시켜 다른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해자들에 대해서도 “일단의 ‘KKK-나치’당원들도 여기 출신들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이 사건의 가해자로 재판을 받은 12명도 그린스보로밖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개스토니아, 링컨턴, 윈스턴-셀럼, 히코리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론을 펴는 사람들은 “이 비극의 중심 인물들은 그린스보로에서 뿌리 박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망한 닥터 짐 윌러의 아내 시그네 월러 폭스워스는 그린스보로에 10년 이상을 살고 있었고 베네트 대학의 교수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수년 동안 이곳에서 좌익 운동에 가담해 활동했죠”라고 주장한다.
이제 76세가 된 폭스워스는 "여긴 내 고향입니다. 많은 공산노동자당 당원들도 그런것 처럼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에 많은 외부인들이 연루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린스보로 지역 사람들입니다." 라고 지난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그린스보로는 투쟁의 온상>
1979년 11월 3일의 사건의 원인과 역사가 무엇이건 그린스보로는 그 동안 투쟁의 온상이었다. 인종주의 긴장감이 돌고 있는 남부 도시에서 그린스보로는 자유와 진보를 상지으로 하는 대학들의 본 고장이다. 민권운동에서 강력한 역할을 한 베네트 대학Bennett College 이나 A&T 대학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이들 대학은 역자적으로 전통적으로 흑인대학이다.
또 퀘이커 교도가 세운 길포드 칼리지의 고장이기도 하다. 남북 전쟁 전후 퀘이커 교도는 남부 흑인 노예를 탈출시켜 북부로 도망하는것을 도와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여권운동의 기수 챨스 던칸 매키버가 주에서 처음오로 정부 지원 여자대학으로 설립한 UNCG도 이곳이 고장이다.
이곳은 또한 한 때 융성했던 섬유 산업의 고장이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컷던 데님(denim: 특히 청바지를 만드는 데 쓰이는 보통 푸른색의 질긴 면직물) 생산 공장 콘 밀Cone Mills이 있던 곳이다. 이 공장은 후에 ‘공산노동당(CWP)’으로 전환된 ‘노동자의 관점 조직Workers Viewpoint Organization’ 의 관심 대상이었다. 콘은 그린스보로 지역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된 5개의 공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합은 힘을 쓰지 못했다.
반 노동조합으로 유명한 남부에서 조합원 유지에도 힘겨워 했다. 당시 공산노동당은 섬유 공장에서 조합원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좌익이나 우익으로부터 적으로 여겨졌다.
‘그린스보로 대학살’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위톤은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내부에 적을 만들었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내부 당원들에게 조차 모욕을 주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당시엔 또 월남전 종전 직후이어 미 전역에서 특히 남부에서 반 공산주의 감정이 팽배해 있었다. 특히 KKK-Nazi당은 공산주의를 증오했다. 이에 대해 ‘노동자의 관점 조직Workers Viewpoint Organization’ 은 이들을 회사측의 앞잡이로 보았다. 이들은 회사가 흑인 근로자와 백인 근로자들을 분리시키는 정책으로 노동조합운동을 탄압하는 조직으로 보았다.
<1984년 5월 4일의 연방법원 재판에 대한 재판 결과에 항의하는 그린스보로 군중들. 연방법원은 4월 15일 재판에서 kkk와 나치 단원의 혐의를 면탈(혐의 없음)했다.>
<공산주의 반대 피켓을 탑재한 차량.> kkk단도, 나치도, 공산당도 모두 싫다는 대학생. 그는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사인을 들고 시위를 했다.>
<사건 일지>
1970년대 후반: 맑스주의자들은 그린스보로 일대 공장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모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있었다.
1979년 9월: KKK와 신 나치주의자 조직인 미 사회당이 동맹을 맺음.
1979년 10월 10일: 시위자들 경찰에 11월 3일에 시위하겠다고 허가서 신청. 경찰내 KKK의 정보원인 도슨이 이를 입수.
1979년 11월 3일: 시위대와 KKK-나치당 충돌. 5명 사망. 10명 부상.
1980년 11월 17일: 재판에서 가해자 모두 무죄 선고.
1984년 4월 15일: 연방법원에서도 가해자 모두 무죄 확정. 배심원 모두 백인.
2001년: 모닝사이드 주택단지 시니어를 위한 타운홈 등을 새로 짓기 위해 철거.
2003년 1월: ‘그린스보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 사건 현장 재 방문 결의.
2004년 5월: ‘그린스보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진상조사를 위한 7명의 위원을 위촉.
2006년 5월: ‘그린스보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2년여의 조사를 마무리 하고 4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 발간.
2007년 3월: 그린스보로 시의회 5-4로 보고서에서 추천한 대책을 거부하기로 의결.
2014년 12월: The North Carolina Highway Historical Marker Advisory Committee 만장일치로 사건 현장에 비를 세우기로 결의.
2015년 1월 15일: 그린스보로 시의회 비 설립안을 놓고 찬반으로 갈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