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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同心草)

 

미국에서 고속도로를 끝없이 달리다 보면 두고온 한국이 생각난다.

보고싶은 부모도 생각나고, 형제, 친구 그리고 두고온 산하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언제 갈 기약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 저절로 입에서 나와 웅얼대는 노래가 동심초이다.

 

동심초는 막연한 그리움을 너무나 절실히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꽃피는 봄이면 더욱 그렇다.

 

동심초는 작곡가 김성태가 1946년에 곡을 썼다.

그러나 그 뒷 이야기는 더 가슴을 적신다.

원래 동심초 가사는 중국 당나라 시인 설도가 쓴 춘망사(春望詞)의 4 수 중 3수를 김억(金億; 김안서로도 불린다)이 번역했다. 여기에 김성태가 곡을 붙였다.

 

이후 이 노래는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을 적시는 감성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고 오늘날에도 불리우고 있다.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설도(薛濤, 768-832)는 중국 당(唐) 왕조 시대의 시인으로 기생이었다.

장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촉(蜀)의 성도(成都)로 옮겼고 후에 기생이 되었다.

그녀가 기생이 된 것은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가 일찍 죽어 가세가 기울어 졌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나이 16세에 기생에 입적한 것이다. 설도는 총명하고 기지가 풍부하여 시작에 능해 원진, 무원형 등 많은 선비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절구(絶句)를 잘 썼으며 스스로 만든 붉은 종이에 섬세하고 감상적인 정취의 시를 썼다. 설도(薛濤)의 시적 재능이 꽃을 피워 성도의 명기(名妓)로 알려진 것은 위고(韋皐)가 서천의 절도사로 부임한 뒤 부터였다. 이 때 설도의 나이는 20세 전후이었고 위고는 40대 초반이었다. 위고는 설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뒷 받침으로 하여 설도의 명성은 성도 일대 뿐 아니라 당 왕조 수도인 장안까지 알려졌다. 그녀의 장기는 4행시인 절구(絶句)였다. 그녀는 이 단시(短詩)로 뛰어난 감각과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설도는 위고가 죽은 후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10살 연하인 원진(元진)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류를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설도는 그 밖에도 유명한 문인, 관료, 처사 등과 교류를 하였다. 그 들과의 교류는 전당시(全唐詩) 안에 수록된 여러 시인들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왼쪽은 설도의 초상화>

 

설도가 알고 지낸 문인은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왕건(王建) 등이고, 장수나 관료들로는 고숭문(高崇文), 이덕유(李德裕) 등 20여명이 넘는다. 하지만 설도는 자제력을 잃지 않고 기생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만년에는 기적(妓籍)에서 나와 도교에 입문하여 여생을 마쳤다.

 

*원진: 설도를 얘기할 때 원진(779 - 831)은 좀 자세한 언급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는 9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 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는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고 그와 더불어 알기 쉬운 새 시풍을 개척했는데, 그는 권력 다툼에 실패해서 중앙에서 밀려나 동천(東川, 혹은 통주(通州))에 좌천되었다. 이것이 대략 809년의 일이다. 약 5년 후에 백거이도 '강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809년 3월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난다. 당시 원진은 동천으로 좌천되어 와 있었는데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사모해서 방문하게 된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설도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에 백 여편의 시를 써서 그에게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정을 시로써 화답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얼마 지나서 두 사람은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때 둥근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며 다시 만나 그것을 둥그렇게 만들 날을 기약했다. 원진은 옛날 은사였던 위하(韋夏)를 만났는데 그는 원진이 기생을 좋아하고 있다고 책망하면서 자기 질녀(姪女)가 그의 처가 되기를 바랬다.

 

후에 원진과 설도는 성도에서 만났는데, 그위(韋)씨녀가 원진을 사랑하여 그 벼루를 잡고 가는 것을 막았고 급기야 벼루를 시냇물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설도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고, 원씨 문중과 부딪칠 수 없음을 알았으며, 또 위씨가 원진을 따르려 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어 드디어 사랑이 깨어지는 아픔을 감수하게 되었다. 원진과 위씨는 결혼을 했고, 설도는 홀로 남아 외로운 난새(鸞새)가 되어 버렸다.

 

위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설도의 조건 때문에 맺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설도는 악기(樂妓)였고, 원진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천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명문 출신은 아니었고, 설도의 나이는 이미 청춘을 벗어나고 있었다.

 

40세나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설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떨어진 꽃의 심사(心思)였고, 그녀에게 오로지 정을 바칠 수 없는 원진은 흘러가는 바람이었다. 사람은 찾았으나 영원히 마음을 엮을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되지는 못한 것이었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를 사랑했다.

 

*김억(金億, 1896-1950 납북):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는 시인. 《오뇌의 무도》등의 시집이 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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