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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앞서 살다간 사람: 나혜석

자유분방한 삶과 비참한 죽음 - 봄날의 화려함과 겨울의 冷한 삶

 

화가, 문인, 독립운동가로 100년 후에 재조명돼

 

지난 4월 한국 각 일간신문에 아래와 같은 짤막한 부고 기사가 실렸다.

 

 “김건(金建) 전 한국은행 총재가 17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1929년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1년 한은에 입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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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10일 밤 8시30분, 신원미상의 한 여성 행려병자가 서울시립 자제원(慈濟院; 병원)에서 홀로 사망했다. 이 신원 미상의 무연고자는 영양실조에다 실어증 중풍환자로 기록됐다.

 

그 초라한 행려병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 나혜석이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해 3남1녀를 낳았다.

 

김우영은 지난달 사망한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의 아버지로, 나혜석과의 사이에 맏딸 김나열을 비롯해 김선(12살 때 병사)-김진(전 서울법대교수)-김건 등을 두었다.

 

나혜석(羅蕙錫, 1896년 ~ 1948년)은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수원시 팔달구 신풍초등학교 후문 근처 그의 집터에 기념비가 서있다. 나혜석의 선친 나기정은 용인군수를 지냈고, 깨인 인사였기에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다.

 

수원에는 나혜석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나혜석 거리’ 이다. 길이가 약 400m쯤 되는 거리에는 나혜석 좌상(坐像)과 입상(立像)이 있고 그의 연보를 새긴 돌 조각이 놓여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어렸을 적부터 총명했다.

 

1910년 8월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1일 경성부에 있는 진명여학교에 편입학했다.1910년 삼일여학교 재학 중 나혜석은 월간지 '개벽'을 위해 단색목판화를 제작하는 등 당시론 드문 개화 여성의 면모를 일찍이 나타냈다.

 

나혜석은 공부에도 뛰어나, 학창시절부터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수려한 외모와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사실은 「매일신보」에 얼굴 사진과 함께 보도될 정도로 이미 스타가 되었다. 당시엔 중등학교 졸업생이 신문에 소개될 만큼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드물었다.

 

진명여고보를 졸업한 뒤 1913년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조선인 여인으론 처음 동경여자미술학교로 유학갔다. 그는 동경 유학에서도 공부를 잘해 당시 언론에 나혜석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기도 할 만큼 이미 유명세를 탔다.

 

1914년 4월 9일자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동경에 유학하는 조선 여학생 수효는 30명에 이르나 번화한 도회 문물에 접촉함과 부모의 감독을 가까이 받지 못하는 까닭으로 모두 성적이 좋다고 이르기 어려우나,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학업을 닦기 위하여 만리 해외에 괴로움을 달게 여김은 청년 남자가 도리어 부끄러이 여길 바이라. 그중에도 제일 학업 성적이 남보다 출중한 여자 유학생은 여자미술학교 생도 나혜석, 여의학교(女醫學校) 생도 허영숙, 일본여자대학교 부속 고등여학교 졸업생 김수창 등 세 규수이다.”

 

 일본 유학 중 그는 현지의 조선인 유학생 단체가 발간한 잡지 ‘학지광(學之光)’에도 글을 기고하여 문인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우수한 성적과 달변으로 많은 친구들과 교제했는데 이광수, 안재홍, 염상섭, 신익희, 주요한, 김성수 등과 교류하였다.

 

그녀의 달변과 깔끔한 외모, 유창한 언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다. 그는 이미 여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유학시절 ‘세이토’라는 페미니스트 잡지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감화를 받은 후 이런 글을 국내외 잡지에 쓴다.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고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세상에 왜 양부현부(良夫賢父)는 없는가?” 나기정에게는 몇 명의 첩이 있었는데, 나혜석과 비슷한 또래도 있었다. 그는 어머니 최시의가 어린 첩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정조관념과 축첩제도, 가부장적 제도에 수많은 의문을 품게 되된다.

 

 나혜석의 자유분방한 사랑과 비극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첫 상대는 오빠의 친구 최승구(崔承九)였다. 일본 체류 중 게이오 의숙 학생 최승구를 만나 연애하게 된다. 최승구는 동경유학생 중에도 ‘천재’로 불리며 잡지 ‘학지광’ 편집을 하기도 했다.

 

오빠인 나경석은 최승구와의 연애를 반대했다. 그는 친구로서의 최승구는 신뢰했지만, 동생의 남자친구로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최승구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 슬하에서 자랐으며, 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도 반대의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최승구에게는 이미 조선에 본처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혜석은 오빠의 반대를 거부하고 최승구와 연애를 계속하였다. 1914년 여름 조선에 있던 아버지 나기정에게서 전보 연락이 왔다.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고 시집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문물과 선진 서양의 문물을 목격하여 근대적 여성의식과 민주주의 개념이 이미 머리 속에 내재돼어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된 그는 차일피일 답을 미루었다.

 

그리고 1916년 나혜석은 최승구와 약혼을 한다. 이후 최승구의 병이 악화되어 1916년 2월경 결핵 요양 치료를 위해 그의 고향인 전남 고흥으로 돌아간다. 동경에 머물던 나혜석은 최승구가 위독 하다는 소식을 받고 급히 일시 귀국하여 죽기 직전의 최승구를 찾아간다. 그러나 나혜석이 방문하고 되돌아간 다음날 최승구는 25세로 폐병과 결핵의 합병증으로 죽는다.

 

당시엔 결핵에 걸리면 대부분 죽었다.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한참 후에 접한 나혜석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후 나혜석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소설가 염상섭은 훗날 “나혜석이 겪은 비운(悲運)이 다 최승구와의 슬픈 사랑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오빠로부터 교토(京都)제국대학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 김우영(金雨英, 1886~1958)을 소개받게 된다.

 

1917년이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살이 많았고, 한 차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3년 전 아내와 사별하여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김우영은 부산 출신으로 나중에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다. 김우영과 나혜석의 러브스토리에 앞서 춘원 이광수(李光洙?1892~1950)가 등장한다.

 

춘원은‘105인 사건’에 연루돼 오산학교 교감에서 물러난 뒤 1915년 와세다(早稻田)대로 유학을 간다. 일본 유학은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후원으로 이뤄진 것인데 춘원은 일본에서 만난 나혜석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꿈꾼다. 그런 그에게도 이미 애인이 있었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이었다. 춘원의 사랑을 좌절시킨 것은 이번에도 오빠 나경석이었다. 춘원이 고향에 백혜순이라는 본처까지 둔 유부남이었던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춘원 사이를 오갔다.

 

동경에서 나혜석은 소설, 시, 희곡, 산문, 논설,기행문,감상문 등 모든 문학분야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여 「여자계 (女子界)」를 창간하고, 단편 소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허영숙과 함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허영숙은 훗날 이광수의 부인이 된다. 조선에 귀국하여 미술 교사를 하던 나혜석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받아 김마리아, 박인덕 등 친구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기획하고, 1918년 겨울 김마리아 등과 함께 비용과 잉크, 인쇄용지, 태극기 등을 마련하고 만세 시위를 준비한다.

 

그리고 3?1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체포되어 5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이때 변호사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론을 맡아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김우영-나혜석은 1920년 결혼하는데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하던 나혜석은 결혼식 청첩장을 보내는 대신 결혼 청첩을 신문 광고로 싣기로 하고 1920년 4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결혼식 청첩을 신문에 연일 광고하여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때 그는 4가지의 조건을 제시했고 김우영이 이를 수용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4가지 조건은 “1.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2.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3.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4. 전(前) 애인 최승구의 비석(碑石)을 세워줄 것.

 

 더 놀랍게도 김우영은 신혼여행차 최승구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준다.” 였다. 두사람의 결혼은 당시 화제를 몰고왔다. 1920년부터 그는 김일엽 등과 함께 개화 신여성 운동을 주도한다. 김일엽은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아들 김태신을 낳고 우여곡절 끝에 32세 나이에 속세를 등지고 수덕사에 들어간다.

 

신혼 초기에도 그는 문예지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화가로서도 치열한 창작열을 불살랐다. 그는 그림을 통해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발표하는 등 여성해방론을 소리 높여 주장했다. 나혜석은 한국 유화를 정착시킨 최초의 전업 화가였다.

 

미술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해 전시?판매 등을 통해 전업화가의 기초를 닦은 선구적 예술가이기도 했다. 많은 선배 남성 화가들이 시대를 한탄하며 붓을 꺾었을 때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림을 그렸다.

 

나혜석은 화가로서 짧은 전성기를 맞는다. 결혼 이듬해 개최한 개인전에 이틀간 5000여 인파가 몰렸으며 70여개의 작품 모두가 고가(高價)에 팔렸다. 1922년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전보되어 그를 따라가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서기도 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도와 주기도 한다.

 

의열단의 김원봉 등에게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여러 시와 소설을 쓰고 신문 만평을 그린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일본인들에게만 특혜를 주고 조선인은 차별하는 것을 계모가 본처 자식들을 학대하는 것으로 희화, 풍자하다가 검열에 걸리기도 한다.

 

또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성인권 향상에 앞장선다. 그러나 아직 봉건적?인습적 관념 분위기가 세간 깊숙히 스며있는 조선사회는 그를 비난하고 냉대한다. 그러나 두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1927년 남편을 따라 나선 유럽 여행길이 파탄을 가져온다. 둘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신의주~중국 봉천(奉天)~하얼빈~시베리아횡단열차 편으로 한달 이상의 여행을 한 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다. 여행은 남편 김우영이 근무 성적이 우수하여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3개월 간의 유급휴가를 받아 이뤄진 것이었다.

 

나혜석은 유럽에서 프랑스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독일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면서 여행은 1년8개월이나 이어진다. 나혜석은 파리에 홀로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공부에 열중하게 된다. 이때 김우영과 절친한 친구인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한다.

 

그가 1928년 시찰차 파리에 온 것이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에 포함된 인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후 천도교에서 활동한다. 이후 최린은 조선총독부와 협력하여 일본의 귀족이 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파리 조선인 유학생회가 최린을 초청한 모임에서 둘은 처음 만나고 “서로가 첫눈에 흠뻑 반해” 사랑에 빠진다. 그해 11월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두사람은 본격적인 불륜을 시작한다.

 

불륜이 길어지자 사람들 눈에 안뜨일리 없고 말이 안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 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은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장면을 목격한다. 결국 두사람은 1930년 11월 이혼한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 김우영은 이혼 4개월만인 1931년 3월 신정숙과 재혼한다. 최린은 나혜석이 이혼한 뒤 그의 너무 자유분방함에 의구심을 느껴 흥미를 잃고, 이별을 통보한다.

 

이에 격분한 나혜석은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로 고소하고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주고 화해를 한다. 최린은 후에 천도교 교령,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등을 지내다가 해방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친일 행각으로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6.25 한국동란 때 납북되어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1년 이후 나혜석은 생활고에 빠진다. 그는 그림 작품 전시와 판매, 칼럼 활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빠듯했다. 1931년 말의 한 편지에서는 “ 과도기에 태어나서 예술을 위해서 살려고 했으나 시어머니, 남편의 몰이해 때문에 당분간 별거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다 저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사정 설명으로 편지를 지인에게 보내기도 했다. 나혜석의 영락이 시작된 이 시기는, 그의 예술 인생의 절정이기도 했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한다. 작품전 실패-맏아들의 죽음-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친다.

 

미술학원을 차려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3남 1녀)와도 전 남편의 반대로 만나지 못하면서 차츰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불행한 생활에 떨어진다.

 

세상에 회의를 느낀 나혜석은 불교에 입문하기 위해 친구 김일엽이 있는 충남 수덕사에 간다. 그러나 김일엽은 나혜석이 자기처럼 수신을 하기에는 너무 격정적이란 것을 알고 단호히 거절한다. 그는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서 5년 동안 머물렀다.

 

이때 그를 찾아온 젊은이들 중에는 훗날 조선화의 대가가 된 고암 이응로가 있었다. 이응로는 나혜석이 수덕여관 체류 시절에 길러낸 제자들 중에 수제자로 인정된다.

 

1943년 수덕여관을 떠났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내선일체에 협력하면 진료비와 집, 화실을 제공하겠다고 회유하였지만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한다.

 

그러나 파킨슨병, 중풍 등의 병세가 심해지면서 거동이 불편해졌고,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거처를 갖지 못한 채 경성의 절집들을 떠돌아 다니다가 1944년 무렵 경성 인왕산의 한 사찰에 정착하였다.

 

나혜석은 이따금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찾아가기도 했지만, 김우영은 경찰까지 동원해 나혜석의 접근을 막았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고 이곳 저곳 전전하다가 1946년 행인에 의해 발견되어 서울의 서울시립남부병원에 입원되었다.

 

그 뒤 병원에서 나와 1948년 공주(公州)의 마곡사(麻谷寺)에 갔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스스로 마곡사를 나와 그해 11월 스스로 용산에 있는 서울 시립 자제원(慈濟院)으로 갔다.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 나혜석은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사망한다. 당시 나혜석은 소지품 하나 없이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 여러 질병으로 대화가 어려웠던 그는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혜석은 잊혀진 존재가 된다. 잊혀진 존재가 다시 등장한 것은 작가 정을병(1934-2009)의 손에 의해서였다. 그가 나혜석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을 1978년에 발표하면서 나혜석의 비참한 죽음이 세간에 알려졌다. 그리고 세상이 변했고 세간의 세시풍습도 변했다.

 

다시 태어난 나혜석은 여권(女權)의 아이콘으로 변해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한 선구적 여성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리고 화가이자 문인으로 독립운동가로 다시 재조명되었다. 1995년 '미술의 해'에 수원의 생가 터에 표석이 설치됐고 2000년 2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1999년에 결성된 기념사업회는 '나혜석 학술상'을 제정하고 수원에 나혜석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2년에는 나혜석학회도 창립됐다.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했다.

 

중 2학년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데 “누군가 밖에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나갔더니 한 여인이 서 있었어요. 손짓을 해서 다가가니 ‘진이야, 내가 누군지 알겠니. 가까이 보니까 아버지를 빼닮았구나’ 그러세요.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하시더군요. 울면서 계속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혼이 달아나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았어요. 수업종이 울려서 꿈꾼 듯 멍하게 교실로 돌아갔죠.” 그 후로 둘째 아들 김진은 생모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후에 네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 기억이 없고, 재혼한 아버지는 생모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대학 2학년이 되어서야 여섯 살 많은 누나에게 부모의 잦은 다툼과 이혼에 대해 들었다고 회고했다.

 

조카 나영균(나경석의 딸, 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고모 나혜석을 처음 본 것은 만주 봉천에서 서울로 온 지 얼마 안 된 1941년쯤이었다고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동네 아이들이 떼를 지어 어떤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입을 벌린 채 덜덜 떠는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할머니가 아버지의 친동생이라는 걸 알고는 더욱 놀랐지요. 고모가 그렇게 찾아오면 어머니는 우선 고모를 씻기고, 머리를 감기고 속옷을 갈아입혔어요. 그리고는 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골방에 숨겼지요. 아버지는 고모의 초라한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못해 화를 냈고, 그래서 마주치면 벼락이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고모를 숨길 수밖에 없었거든요.”

 

반세기가 지난 후 2009년 그의 둘째 아들 김진 전 서울대 법대 교수(당시 83세)가‘그땐 그 길이 왜 그리 좁았던고’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아버지의 생전 면모를 중심으로, 어머니에 대한 일화와 가족들의 상처를 엮어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간 나혜석의 아들임을 숨기고 살아온 김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돼서 마음의 응어리를 다 쏟아낸 거죠(웃음). 저는 평생 생모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어릴 때 헤어져 생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데다가 어머니 때문에 불행해진 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웠거든요. 한번은 이런 상처를 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 실행에 옮긴 거죠. 책을 내고 나니 홀가분하고 차분한 기분입니다.

 

이제 드러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돼 더없이 기뻐요.” 책을 낸 데는 다른 동기도 있다. 그간 나혜석에 대한 고찰과 연구는 활발했지만 남편 김우영에 대한 조명은 부족했다. 김 교수는 “어머니에게 입은 상처로 일생을 휘청거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묻혀 없어질 뻔한 이야기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수원의 나혜석 거리에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의 나혜석에 대한 상념이 뭉게구름처럼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상념은 서로 얽어져 군중의 머리위에 그의 영혼으로 형상되어 떠다닐지도 모른다. 매일 매일 그렇게 해서 나혜석은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해석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정리: nc한국인뉴스 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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