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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트 올리브에 갑자기 아이티인 몰려

마운트 올리브 경찰 서장 브라이언 로드는 조그만 마운트 올리브에 새로운 뉴 커머가 있다는 것을 2010년 할로윈 데이 때 알아 차렸다.

<사진: 아이티 이민자인 수제트 루빈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마운트 올리브의 아이티인을 위한 수퍼마켓을 다운타운에 열었다. >

 

이때 그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근처 슈퍼마켓에서 카트에 식품을 가득 싣고 다운타운 거리로 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바로 싸이렌을 울리고 차 창문을 내리면서 "카트까지 가져 가는 것이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열심히 뭐라고 서장에게 설명했다.

<사진: 마운트 올리브 교회에서 아이티인들이 밴드를 하고 있다>

프랑스 방언이었다. 그제서야 로드 서장은 지금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2010년 여름부터 골즈보로 남쪽에 붙은 이 조그만 마을에 아이티(Haiti) 이민자가 밀려 들었다. 마운트 올리브는 피클 제국으로 잘 알려져있을 만큼 피클 생산지로 유명하다. 이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플로리다를 강타한 경기 침체로 그곳에서 일자리를 잡지 못하자 그곳을 떠나 이곳에 온 사람들이다.

 

일부는 2010년 1월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이후에 이곳으로 왔다. 인구 4,600명인 이곳에 3,000여명의 아이티인이 몰려왔다. 야반잠입한 것처럼 2010년 인구 총조사 때만 하더라도 아이티인은 한명도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 이들을 이곳으로 오게한 유인 요인은 버터볼(Butterball) 칠면조 가공 공장을 비롯한 몇개의 육가공 회사이다.

 

마을 한귀퉁이의 레스토랑에서 로즈 마리 할머니가 열심히 쌀밥을 만들고 검은 콩와 삶은 쇠고기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아이티 대지진 후 아이티에서 이곳에 왔다. 밤새 일해 허기에 찬 일단의 아이티 노동자들이 야간 교대 근무를 끝내고 할머니의 레스토랑에 몰려 들었다. 몇 블록 떨어진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일 침례교회는 다문화 장소가 되고 있다.

 

 마운트 올리브 토박이 백인 몇몇이 조용히 예배를 보고 있는 동안 80여명 이상의 아이티인 들은 펠로우쉽 홀에 모여 프랑스 방언으로 밴드와 드럼에서 나오는 떠들석한 비트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랄리 솔리드 록 교회에서 온 아이티인 목사 소비어는 "이곳은 죽은 마을 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기를 불어 넣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처럼 갑자기 아이티인이 들어 온 것은 이곳에 하나의 전설처럼 아이티인 사이에 이야기 되고 있다. 2010년 여름이 다가는 어느날 버터볼 회사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티인 한명은 그의 보스가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보스는 근로자 허가 때문에 적어도 12명 이상의 근로자를 서둘러 교체해야 한다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이때 이 아이티인은 바로 그 보스에게 자기가 새로운 근로자를 데려 오겠다고 말했다. 즉시 마이아미에 있는 몇몇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이틀후 일하고 싶어 하는 열망으로 가득찬 아이티인들이 밴 두대에 나위어 실려 왔다. 버터볼 회사는 바로 이들을 모두 고용했다.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진 배티스트(25)는 친구의 이러한 전화에 물어보지도 않고 밴에 올라탔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시간당 $11.47를 받고 60파운드 넘는 칠면조를 컨베이어 벨트에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생활은 단조롭다. 마이애미와 같은 벅적벅적한 것은 없다. 일하고 교회나가서 예배보고 같은 아이티 사람과 이야기 하고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마이애미로 갈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이곳이 좋다는 것이다. 2010년 1월 이후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아이티 사람들은 거주 신분이 합법화 되었다. 미국 정부는 황폐화된 아이티에서 탈출한 사람, 이미 미국에 있어 아이티에 돌아갈 수 없던 사람들에게 임시 보호정책을 부여했다. 이 임시 비자는 워크 퍼밋이 주어지고 2013년 1월에 만료 종료 된다. 그러나 연장 할 수 있고 이미 만기가 된 비자도 또 종종 연장되고 있다. 1987년 아이티의 부패한 정권하에 있다가 미국으로 탈주한 진 볼트와(53)는 자랑스럽게 지갑에서 취업 허가 카드를 지니고 다닌다.

 

그는 뉴욕에서 창고 근로자 감독으로 일하다가 부동산 경기가 무너진 후 마이애미에서 아이티인을 대상으로 모기지 회사를 꾸리기도 했다. 그는 먹고 살기도 버겁게 지냈다. 아이티에 있는 세 누이 동생들에게 매월 $300 씩 보내 주었는데 그것도 힘들었다. 그후 그는 죠지아에서 채소 농장에 일하다가 마운트 올리브로 왔다. 그가 마운트 올리브에 온지는 6개월이 되었다. 그에겐 마운트 올리브가 새로운 약속의 땅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시간당 $9.82을 받고 야간 교대조로 버터볼 공장에서 가공된 칠면조를 포장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UNC-Chapel Hill 경영대학원 짐 죤슨 교수는 이러한 경향을 전형적인 노동자 이민 역사의 한 흐름의 새로운 조그만 물결이라고 설명했다.

 

즉 다 아는 것처럼 3D 업종,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아 이 일을 이민자가 떠 안고 있다고 말했다. 버터볼 관리자는 이곳에 위치한 버터볼 회사 뿐아니라, 하우스 어브 래포드(House of Raeford), 스미스필드 푸드(Smithfield Foods), 마운트 올리브(Mount Olive Pickle plant) 등 모두 이민자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12년 전부터 일어났다고 한다. 그때는 멕시칸들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갔고 일부는 귀국했다고한다. 그리고 현재는 소수의 히스패닉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처럼 갑작스런 외지인 들로 이 조그만 마을도 주거환경 등 이들에 대한 대책 마련에 바빠졌다. 이들 대부분은 야간 근무자들과 교대하기 때문에 한 집에서 무리를 지어 교대로 잠을 자는 방식으로 좁은 집에서 함께 산다고 한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그 대책 마련에도 부심하고 있지만 별 뾰쪽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방 정부와 마을 지도자들은 협심하여 잘 대처해 나가자고 다짐한고 한다.

 

*마운트 올리브(Mount Olive): 골즈보로 외곽 도시. 인구는 2000년 조사 때 4,567명이었다. 유명한 마운트 올리브 피클 회사가 자리잡고 있다. 칠면조 고기를 생산하는 버터볼 회사도 이곳이 본거지이다. 마운트 올리브 대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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