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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중국 역사의 여걸이자 냉혈여

당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그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는 중국 내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측천무후의 릉>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당의 전성기를 연 유능한 인물이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을 폐위시키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시대적 배경> 광대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나라는 진이다. 그래서 진의 첫 황제를 진시황제라고 한다. 그는 폭군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어쨋던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이게 기원전 221년 일이다.

 

이후 중국은 분열과 통일이라는 흥망성쇄의 왕조 역사를 청조가 망한 1912년까지 이어왔다. 측천무후가 등장한 서기 680년 전후는 중국이 다시 수나라에 의한 천하통일후 수 양제의 극심한 폭압에 각지에서 군사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의 시기였다.

 

결국 수나라는 망하여 당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수나라 말기 이러한 시기에 측천무후는 아버지 무사확(武士확)의 둘째 딸로 624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목재상으로 대토목공사에 참여하여 거부가 되었다. 돈 많은 그는 당시 수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태원 유수 이연(李淵)측에 참여하였다. 이연은 수 양제를 패배시키고 당 왕조를 창건하였다.

 

이 사람이 당 고조이다. 그후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은 형과 아우를 죽이고 626년 제 2대 황제에 오른다. 이 사건이 이른바 '현무문의 변' 이다. 당 태종이 된 이세민은 영특한 군주로 그의 치적은 후에 '정관의 치(貞觀─治)' 로 불리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평가받고 있다. 측천무후는 이때 나이 14세로 용모가 빼어나고 재주가 많다는 이야기가 들려 당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후궁으로 들어가기전 어릴적 이름이 미랑(媚娘)이어 십 수년전에 중국에서 제작된 TV 극에 미랑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미랑(나중에 성인이 된 이름은 무조이다.)은 똑똑하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애교가 없어 당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 당 태종이 죽자 후궁들은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감업사에 들어간다. 당태종의 아들 이치는 미랑이 후궁이었던 시절 궁중에서 그녀를 보고 반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부친이 죽고 제3대 황제가 되자 감업사에 가 있던 미랑을 궁중으로 데려 온다. 이가 당 고종이다. 이 당 고종이 바로 668년에 신라와 연합아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인물이다. <미랑의 입궁> 무조 미랑이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고종의 황후인 왕씨의 도움이 컸다. 왕씨는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숙비를 질시했는데, 그런 그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불러들이라고 이치를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이치와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이치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이리하여 무조는 비(妃)가 되었다. 하지만, 야심만만했던 무조는 왕씨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그들을 이용하여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무조는 어느날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을 황후 왕씨가 매우 좋아하였다. 하루는, 왕씨가 무조의 딸을 보고간 후,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졸라 죽여버렸다. 그리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 때, 고종 이치가 들어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 모함하였다.

 

이에 이치는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키고,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 때가 654년 10월 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왕씨와 소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 하였다고 한다. <비정한 어머니> 그녀는 또한 비정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고종 이치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살시키도록 강요했다. 또한, 장손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656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우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황태자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런 그녀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녀는 대신들을 폐황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보내졌다가,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치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얼마 뒤, 이치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치는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이치와 대소 신료들에서도 신임이 두터웠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씨는 675년 이홍에게 독약을 보내 그를 죽였다. 그 후로, 그 다음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였다. 무씨는 아들의 총명에 위기감을 느껴 이현에게 여색을 밝힌다 모함하였다. 680년에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당했으며, 684년에 파주(巴州)에서 어머니 무씨가 보낸 자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해, 무씨는 예종 이단을 황제에서 폐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자신을 칙천 금륜대성신황제(則天 金輪大聖神皇帝)라 칭했고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으며 도읍을 장안에서 신도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무씨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악독한 대신들을 임명하여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잔혹하게 몰살시켰으며 국법을 더욱 엄히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적재적소에 의한 인사등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무씨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잡아 죽이기까지도 했다. 무씨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도 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705년에 측천무후는 병에 걸렸고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기전 그녀는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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