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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따금 주일 낮 대 예배를 드리려 나가는 교회에 있었던 저녁 목장 모임에서 저의 칼럼을 계속 읽고 있다고 하시는 집사와 대화 중에 저를 "liberal"하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는지는 불문에 부치고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마음에 잔잔한 기쁨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었습니다.
제 스스로 "liberal"이란 딱지(label)를 붙여 저 자신을 분류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만 나를 설레게 하는 영어 단어였습니다. 모임 후 눈보라 치는 밤 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하면서 집으로 가는 중에도 그 단어가 계속 영감으로 떠올랐습니다.
가까스로 무사히 집에 도착해 무엇보다 먼저 영어 사전을 펴고 "liberal"이란 단어를 찾아 죽 읽어 내려가다가 제 무릎을 탁 치면서 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주님이 바로 "liberal"(자유로운)하셨던 분이시로구나 생각했었습니다.
주님 계시던 당시는 정치적으로 불안해 어떤 이들은 로마 점령군 타도를 꾀하기도 하고, 산이나 광야로 도피 생활을 하기도 하고, 유대교 율법으로 똘똘 뭉쳐살기도 하고, 아니면 로마 정부에 아부하면서 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한 가운데 예수님은 과거부터 내려온 그 어떤 주의, 제도나 관습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뭇 사람들에게 치유의 능력을 베푸시면서 박애 정신으로 마음껏 자유(liberal)롭게 사시다가 엄청난 대가인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자유는 이렇게 매우 값이 비싼 것입니다. 무엇 보다 먼저 맘-몸이 하나 되려는 피땀의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 것 없이는 실속 없는 허랑 방탕(libertine)한 삶일 것입니다.
주님은 liberal하셨지만 절대로 libertine하시지 않았습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내적 자유를 인류에게 보여주셨던 주님을 맞이할 세례 요한도 겉치레만을 강요하는 기성 세대 정치인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독사의 새끼들"(sons fo vipers)이라 욕도 하고 그 대가로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기존 정치 권력자를 "저 여우"(교활한 놈)라 평하시고 기존 세력 종교인들인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을 향해 '화있을 진저!"라고 외치시면서 속과 겉이 다른 삶을 지적하셨습니다.
몸-맘이 하나 되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 것 인지를 모르고 진부한 것에 매여 사는 일이 지금도 여기저기서 활기를 띠고 있어 참된 자유와의 사이가 껄끄럽습니다. 내적 자유가 결여되면 외부로부터 오는 등쌀에 들볶임을 당하는 격일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체질과 자연 환경과 역사적 흐름에 순응함이 없는 자유는 무모한 짓일 뿐만 아니라 비굴한 짓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억지가 아닌 자율적으로 우러나올 자유를 위해 값비싼 노력과 기다림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생애 마지막 짧은 자유 자재로운 공 생애를 위해 30 년간 기나 긴 준비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건성으로 웅성거리는 곳이 아니고 무엇보다 먼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곳이라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사악하고 악독한 성질을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인의 후예인 우리들이 "종교와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미끼로 삼아 첨단 과학 문명에 마음을 빼앗기어 양심이 무디게 된다면 누가 뭐래도 양심이 인정할 수 있는 참 자유가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것은 노예 근성일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21 세기는 인공 지능이 발달돼 "말씀 과잉"으로 중독되어 "말씀 부자병"을 앓고 있는 세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격에 새겨질 그리고 새겨진 말씀(Word)이 비인간적인 "말 많은 말"(words)로 전락 되고 있지는 않는지 우려됩니다.
게다가 언짢을 까봐 남의 눈치를 보고 교회에 나오거나 피하거나 점잖게 행동해야 되는 현실을 보면 주님을 닮아가기란 참으로 어렵고도 불가능하기까지 느껴집니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여생을 자유롭게(Liberal) 살기를 바라면서 종종 포도주를 잔에 따라 마시면서 주님이 가신 자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구해 봅니다.
다가오는 한 달 동안도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에 살면서 남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이 양심 속에서 용솟음치는 자유를 마음껏 향수 하시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다음 달 칼럼에서 자유롭게 다시 뵙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풍암 박 오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