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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오현 칼럼: 예배 드릴 시간과 장소는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박오현 박사(Ph. D), 은퇴목사 (PCUSA) 겸 명예교수(Appalachian State University)

 

8 월 달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 세상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고 있는 것에 부지런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이고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 일에만 몰입함으로 인해 삶에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일에 열중함으로 그 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입니다만 삶의 다른 면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거나 무시하게 된다면 바람직하지 못한 문제들이 생길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인생 삶은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폭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삶의 한 곳에만 깊이 집중하게 되면 삶의 시야가 점점 좁아지게 될 가능성이 많아 앞일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연을 둘러볼 수 없고 하늘을 우러러 볼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그 일만을 절대화하기 쉽습니다.

 

그런 절대화로 인해 결국 견문이 좁아져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일벌레나 놀이꾼같은 중독자가 많은 가운데 몇몇 다른 예를 든다면 다른 학문을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과학만을 절대화하는 과학 만능주의자가 있기도하고 또 많은 상대적인 신들 가운데 하나만을 절대화 하게되는 우상숭배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삶의 일부를 절대화하지 않고 절대 자체인 삶 전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때에 하면서 살아가려는 삶이 참된 삶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이 특정한 일에 사로잡혀 해어나지 못하게 되면 시간이 흐름에따라 무의식적으로 자기 하는 것 이외의 일상생활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하고 살기가 십상입니다.

 

특히 일만을 중요시하다 보면 휴식이나 놀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될 수있습니다. 종교계에서는 특정한 시공을 구별하면서 바람직 하지 못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허다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일요일, 유대교는 토요일, 이슬람교는 금요일만을 거룩한 날로 갈라놓아 무의식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이중적 삶을 초래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삶을 이분해서 살게되면 모르는 사이에 반쪽짜리 삶에 미치거나 중독자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많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반쪽 짜리 삶을 가볍게 여기는 고치기 어려운 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고질적인 병을 치유하기를 바란다면 일과 놀이, 시간과 공간을 갈라 놓는 사고 방식을 초월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관습으로 지켜온 이분법 생각을 버린다거나 고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이분법 사고 방식을 초월하여야 된다는 깨달음 자체가 매우 중요한 21 세기의 시급한 종교개혁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시공의 핵심인 삶 자체를 쪼개는 이분법 때문에 삶의 우위를 정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해 무시당하고 도외시 당한 삶이 반드시 반기를 들고 일어나 원치않는 인생 문제를 초래하게 됨을 지금 까지의 인생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혈기가 왕성할 때에는 능동적으로 원하는 대로 흑백논리인 이분법으로 시간과 장소를 분리해서 잘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지나면 무시했던 반대 삶을 억지로라도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 보다 우선 삶다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삶 자체인 시간과 공간을 쪼개지 않고 사고하는 방식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을 이야기할 때 늘 과거, 현재, 미래로 갈라서 이야기 해왔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아니한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짜 존재하는 시간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 숨쉬고 있는 지금입니다.”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기대 하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영원한 지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란 바로 지금 뿐입니다.

 

둘 째, 둘도 없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바로 지금”이란 시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비교될 수도 없는 “바로 여기”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림니다만,거룩한 장소는 그 어디에도 아닌 우리 각자가 숨쉬고 있는 바로 여기입니다. 스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참된 이유는 인간이 지금 숨쉬고 있는 바로 그 곳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절대자 하나님을 다른 곳 아니면 미래에 찾을 줄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마치 하나님을 어디다 숨겨놓고 찾아내려는 숨바꼭질 놀이처럼 간주하고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둘도 없는 절대자 한 분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칼럼을 쓰고 있는 저와 읽고 계시는 여러분 숨 쉬는 속에서도 계실 수 있어야만 “자존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가만히 마음을 놓고 동요함 없이 잠잠히 내면을 향하다 보면 대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고 하늘의 영광을 우러러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 모습 이(그)대로 거룩한 마음으로 자연을 둘러볼 수 있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아름답고 거룩한 예배입니다.

 

각자가 숨쉬고 있는 지금 여기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만 아니라 삶의 참된 안식처라 생각하니 행복하기 그지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렇게 둘레 없이 예배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자들이 특정한 시간(주일)과 지정한 장소(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게 된다면 질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거룩한 예배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 예배를 특정한 장소나 시간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여기서도 드릴 수 있길 빌면서 다음 달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 허락하신다면 다음 달 칼럼에서 다시 뵙기로 하겠습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3)

 

풍암 박 오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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