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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사람
내 추억이 깃들여 있는 대학로 대로변 돌에 새겨져 있는 시가 있다.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내가 함 선생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란, 김용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님께 들은 일화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 선생님이 가꾸던 농장이 충남 천안에 있던 고향집과 가까웠던 것이 계기가 되어, 김 교수님은 일찍부터 함 선생님을 인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우리나라 이공계의 원로이신 김용준 선생님은 독재정권에서 두 번씩이나 해고를 당하시면서도 지조와 기개를 굽히지 않으신 올곧은 선비이시다. 평소에 그분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대하시는 경건한 자세를 보며, 그리고 그런 분이 스승으로 섬기시던 어른이 남긴 작품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천천히 이 시를 음미할 때마다, 깊은 자탄에 빠지게 된다.
나는 아직도 더 많은 세월을 살아야 하겠구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준엄한 질문에 나는 아직도 "그렇습니다." 라고 선뜻 고개를 끄덕일 자신이 없다. 불의(不義)의 형장에서 목숨걸고 나를 변호해 줄 그 사람이나, 또는 기울어 가는 난파선에서 내가 자신을 위해 서슴없이 구명대를 양보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그러한 사람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맺어 주는 가장 기초적인 얼개는 믿음이다. 안심하고 처자식을 맡긴 채 먼길을 떠날 수 있고, 그런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돌보아 줄 만한 신의가 없다면, 잔디와 난초 같은 향기로운 인간관계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는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약속에 의해 굴러간다. 교통신호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생명과 질서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런 마당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인간관계가 원만히 유지되리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 이라는 말은 한가로운 농촌에서든 복잡한 도시에서든, 누구도 거미줄처럼 촘촘히 싸인 공적 ․ 사적인 인연, 제도적 ․ 개인적 관계, 직접적 ․ 간접적 네트워크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도 고립된 섬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라는 대륙의 한 부분이다. 수도승들 가운데는 몇 년씩 토굴에 깊이 들어앉아 혼자 마음을 닦는 분들도 많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관찰하며 지혜를 얻었다. 나 또한 혼자 있어야 온 세상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가르침에 공감한다. 그러나 눈만 밝다면 진리는 자연 속에도 있고, 사람들 속에도 있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 발을 디딘 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나는 아무래도 소크라테스를 더 좋아한다. 여전히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도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인생공부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