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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게 1895-1944>
독소 전쟁의 물줄기를 바꾸다.
모스크바 공방전이 한참이던 1941년 12월 독일 육군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적군 소련군에게 더 이상 대규모 예비부대는 없다고 보고했다. 독일군 참모총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해 6월22일 독소 전쟁 발발 이후 266만 3000명의 소련군이 전사하고,335만명이 포로로 잡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독일군이 하나의 소련군 부대를 분쇄해도 다음 날이면 또 하나의 소련군 부대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군들은 질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 많은 병력이 나타난단 말인가? 해답은 간단했다. 그들은 시베리아에서 온 군대였다. 극동군 사령부 예하 병력 18개 사단, 바이칼 지방에서 개 사단, 외몽고에서 1개 사단, 아무르 지역에서 3개 사단, 만주 국경에서 6개 사단이 이동해 왔다. 독소전쟁이 일어나기 전 시베리아에는 바이칼 이동의 30개 사단 등 만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원래 만주에 배치된 일본군 관동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부대였다. 일본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일본의침공 우려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시베리아 방면의 병력을 주저없이 독소 전선으로 돌렸던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이동해 온 군대의 활약에 힘입어 소련군은 모스크바를 방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기간 내내 소련은 일본의 침공 가능성은 전혀 걱정하지 않고 독일과의 전쟁에 모든 군사력을 투입했다. 그리고 결국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스탈린에게는 일본은 절대로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정보가 있었다. 정보는 일본 동경에서 암약하고 있던 소련군 참모본부 정보국 소속 정보원이 보내온 것이었다. 정보원의 이름은 리하르트 조르게였다.
공산주의 운동가에서 정보원으로 리하르트 조르게는 1895년 러시아의 바쿠에서 독일인 유전 기술자 빌헬름 조르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조르게의 조부 프리드리히 조르게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동지이자 1852년 도미해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뿌리를 내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조르게의 부친은 비스마르크와 독일을 선호하여 다시 독일로 돌아와 러시아에서 일하고 있었다. 조르게는 애국자로 성장했다. 그런 망상을 산산히 파괴한 것은 그가 지원병으로 참전한 제1차 대전이었다. 그는 용감한 병사였다. 1915년 그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축이 도살 당하듯 하루에 수만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전쟁을 혐오하는 사회주의 노동자 출신의 전우들과 교류하고 나서 ‘조국’이 야수 군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듬해 봄 그는 포탄 파편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입원해있는 동안 조르게는 한 간호사와 관계를 맺게 됐다. 그녀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그의 영향으로 조르게는 공산주의 관련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1917년 혁명이 일어나고 패전국 독일에서 공화국이 성립된 뒤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다. 함부르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조르게는 잠시 언론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후 '빨갱이’로 당국에 찍혀 교사직 등에서 쫓겨난 그는 소련에 이주해 1925년에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소련을 국민국가가 아닌 사회주의적 세계 혁명의 발원지로 인식하고 있던 당시 공산주의자 입장에서는 소련 국적의 취득이 '조국을 등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조르게의 러시아 부인 에까떼리나 막시몬. 1943년 소련에서 간첩 혐의로 5년의 유형을 받고 동년 38세에 유형지에서 사망하였다.>
소련에서 그는 코민테른 국제연락부에서 일하면서 미래의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이때 그는 OGPU (소련의 합동국가정치보위부 KGB의 전신)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학구적인 독일 공산주의자가 소련군 첩보부로 직장을 옮긴 것도 ‘특수한 종류의 세계 혁명 사업'일 뿐이었다. 조르게는 어학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는데,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했다. 착실하게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코스를 밟고 있던 조르게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GRU의 창설자 얀 베르친이었다. 베르친에 의해 GRU 정보원으로 발탁된 조르게는 언론인 신분으로 위장하고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각국에서의 민중봉기 가능성을 탐색했다.
1929년에는 영국에 파견돼 영국의 정치, 경제 현황, 노동운동 실태 등을 연구했다. 독일로 돌아온 조르게는 좌익운동과 단절하고, 나치당에 접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30 년 조르게는 한 독일 신문의 특파원 신분으로 중국 상해로 파견됐다. 그는 언론 활동을 하는 한편, 중국 전역에 GRU첩보망을 구축했다. 일 수상 측근도 스파이 조르게는 타고난 친화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 중에는 후일 서안사변 현장 방송,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연안 방문 등으로 이름을 떨친 미국의 여류 언론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도 있었다. 아그네스는 조르게에게 일본 <아사히>신문 상해 특파원 오자키 호즈미(尾崎美·1901~44)를 소개했다. 당시 오자키는 일제의 만행에 가슴 아파하고 있던 친중파 마르크시스트 이었다. 오자키는 중국에 체류하면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1891~1945) 일본 총리의 중국 문제 ‘브레인’으로서 중국 침략의 본격화를 말리려 했다. 오자키는 조스게의 주된 정보원이었다. 이것이 ' 조르게 간첩단 사건’의 발단이었다.
상해시절 조르게는 루스 쿠친스키라는 독일 출신 여성 공산주의자를 정보원으로 포섭했다. 쿠친스키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영국에 소련 첩보망을 구축,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기술을 소련으로 빼돌렸다 (1945년 7월 원자폭탄 실험이 있은 후 트루먼 미 대통령은 『원폭 제조 기술은 향후 20년 간 누설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때는 이미 원폭 관련 정보들이 소련으로 넘어간 후였다).
조르게는 일본과 독일간의 동맹관계 구축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입수,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GRU 총책 얀 베르친은 조르게에게 동경의 첩보조직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베르친의 관심은 사실 일본이 아니라 독일이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혹독한 탄압으로 소련 정보망이 거의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베르친은 독일과 일본이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면, 동경은 독일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중요 거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르친은 조르게에게 일본에서의 정보망 구축에 필요한 전권을 부여했다. 조르게 같은 우수한 인재의 경우, 그에게 충분한 자유재량을 줄 때 100% 능력 발휘가 가능하다는 것이 베르친의 생각이었다.
조르게는 먼저 자신의 「신분세탁」부터 시작했다. 독일로 돌아간 그는 선전부 관료들에게 접근했다.「전독일공산당원」조르게가 어떻게 해서 선전부와 게슈타포의 엄중한 신원 조회과정을 통과했는지는 모른다. 하여튼 그는 프랑크푸르트 차이퉁지를 비롯한 몇 개 독일신문의 주일특파원으로 둔갑하는데 성공했다. 1933 년 9월 조르게는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일본에서의 정보활동을 위해서는 먼저 일본 사회와 문화를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후일 그가 체포됐을 때, 그의 서재에는 1000여 권의 일본 관련 서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상해 시절 사귄 오자키 호즈미, 독일인 무선기사 막스 클라우젠 등과 함께 만주에서 일본 본토에 이르는 간첩망을 구축했다. 오자키는 사이온지 긴모치 전 수상 등 정계 거물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조르게는 주일 독일대사관 관계자들과도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걸려든 사람은 주일독일대사관 무관 오이겐 오트 대령이었다. 일본어를 못해 쩔쩔매고 있던 무능한 정보장교 오트 대령은 정보수집과 관련해 조르게에게 많이 의지했다.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됐다. 나중에 오트 대령은 주일 독일대사가 됐다. 주일 대사관 관계자들은 대사의 친구인 조르게와 어울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정보들을 넘겨줬다. 독소 전쟁 정보 보냈으나 묵살당해 1940년 후반 어느날 조르게는 주일독일대사 무관과 술을 마시다가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히틀러가 軍장성들과 회의를 하면서 소련을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조르게는 부랴부랴 이 사실을 모스크바로 보고했다. 스탈린은 이 정보를 묵살했다. 심지어 그는 조르게의 충성심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1941년 3월 5일 조르게는 독일이 6월 중순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독일어 문서를 입수, 마이크로 필름으로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 해 5월 15일에는 침공날짜가 6월20일이라는 보고를, 5월19일에는 150개 사단 300만 명의 독일군이 독소 접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냈다. 일본 애인과 마지막 밤을 보내다가 체포돼 하지만 조르게의 종말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1939년 일본 헌병대는 불법화된 일본공산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포착했다.
<동경에 있는 조르게 무덤>
일본 공산당 내부에 소련을 위해 첩보활동을 하는 비밀조직이 있다는 것이었다. 헌병대는 이 조직원 100여 명의 명단을 입수했다.그 가운데는 오자키 호즈미 등 조르게의 조직원 두 명이 포함돼 있었다. 조르게도 수사망이 점차 조여오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1941년 10월 오자키가 체포됐다. 조르게는 일본을 탈출할 모든준비를 마쳤다. 조르게는 무전책임자 클라우스에게 마지막 보고 내용을 넘겨주었다. 그것은 1941년 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후, 동남아로 진출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클라우스는 이 무전을 발신하기 직전, 헌병대에 체포됐다. 조르게로서는 이제 몸만 떠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르게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있었다. 그의 애인인 일본인 무희였다. 조르게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녀의 아파트에서 보내기로 했다. 애인에게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기 때문일까? 조르게는 헌병대의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다는 조직원의 메모를 받은 후 이를 소각하지 않고 찢어서 숙소 바닥에 버렸다. 거물 스파이답지 않은 실수였다. 헌병대가 이 쪽지를 주워 복원했다. 결국 조르게는 애인 품에 안겨 동경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다가 헌병대에 체포되고 말았다.1941년 10월18일이었다.
조르게는 1944년 11월7일 오전 東京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처형됐다. 교수형 집행 전 그는 형무소 직원들에게『그동안의 친절에 감사한다』고 인사했다고 한다. 그의 동료 오자키도 함께 처형됐다. 1941년 10월 조르게가 체포됐을 때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정권이 바뀌었을 정도다. 공작금도 없이 일했던 조르게는 소련에 버림받았다. 소련은 그의 존재를 부인하며 일본의 석방 교섭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르게 등을 위해서 조치를 취하기는 커녕 조르게의 러시아 부인을 시베리아로 귀양을 보내 거기에서 1943년에 병과 굶주림 등으로 죽게 놔두었다. 소련이 조르게의 공적을 인정한 것은 1964년, 조르게가 교수형에 처해진 1944년 11월7일로부터 20년만이다. 어떻게 자국의 국운을 건진 사람들에 대한 ‘배은망덕’이 가능했을까? 답은 이렇다. 조르게는 국민국가로서의 소련에 애국심을 느꼈다기보다는 파시즘의 패망과 궁극적인 세계 혁명을 갈망한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였으며, 그를 처음에 코민테른·군 첩보부에 취직시킨 후견인들 역시 1937~39년에 숙청당한 국제주의자들이었다.
조르게는 1939년에 모스크바로부터“잠시 귀국하라”는 밀명을 받았지만, ‘귀국’이 곧 고문·총살을 의미하는 줄을 알고 각종 핑계들로 도쿄에 계속 남았다. 스탈린의 득세 이전 시기의 ‘잔류자’로서의 조르게는 스탈린에게서 적지 않은 불신을 당했다. 그래서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 대한 그의 첩보를 스탈린이 무시해 엄청난 손실을 보기도 했다. 조르게는 스탈린 정권에 정보를 계속 제공했지만 그와 스탈린의 관계는 ‘동상이몽’형이었다. 그러면 스탈린의 독재·숙청을 비판적으로 봤던 그가 과연 무엇 때문에 모스크바와 계속 협력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혹시 그는 소련이 언젠가 기형적인 독재를 벗어나 사회주의 국가다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을 기대했을까. 아니면 소련을 파시스트 독일이나 일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긍정적 세력’으로 의식했기 때문일까. 단순한 ‘체제의 분신’이 아니었다 조르게·오자키는 결코 스탈린주의 체제의 ‘분신’이 아니었으며 소련의 체제도 그들을 ‘충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협력의 길을 자율적으로 선택한 비판적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동상이몽’형이었다.
그러면 스탈린의 독재·숙청을 비판적으로 봤던 그가 과연 무엇 때문에 모스크바와 계속 협력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혹시 그는 소련이 언젠가 기형적인 독재를 벗어나 사회주의 국가다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을 기대했을까. 아니면 소련을 파시스트 독일이나 일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긍정적 세력’으로 의식했기 때문일까. 사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리라는 정보는 조르게 말고도 여러 루트를 통해 소련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절대권력자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이후『독일의 침공은 절대로 없다』며 관련 정보들을 철저히 묵살했다.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은 소련을 침공했다 (조르게가 당초 보고했던 날짜보다 이틀이 늦은 것은 기상악화로 침공 일자가 이틀 미루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동안 조르게의 정보를 무시해왔던 소련은 그의 가치를 재평가했다. GRU는 그에게 끊임없이 더 많은 정보를 요구했다.
1941년 7월초 일본정부는 대외 침략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어전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독일과의 동맹을 중시해 소련을 치자는 주장과, 전쟁수행에 필요한 전략물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로 진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1941 년 8월, 관동군 간부들이 동경으로 소환돼 군사회의에 참석했다. 1941년 9월 일본은 남진 정책을 확정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 일부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던 시베리아의 소련군을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했던 것이다. 그 결과 역사의 물굽이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