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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져 사시는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따금 사회적인 사귐을 잠시나마 뒤로 하고 홀로 있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도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고 또 고립하기 위함도 아닌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 보려는 의도 하에서 가급적이면 밖으로 향한 오관을 닫아버리고 빈손으로 “홀로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반드시 정해져 있는 시간은 아닐지라도 어떤 이들은 새벽보다 훨씬 전에 그들의 절대자 혹은 하나님과 홀로 있을 때가 더 좋은 시간이라고도 합니다. 각자의 적성에 따라 이같은 시간을 가지는 것은 동식물과는 다른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것이고 정신 건강에도 매우 유익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홀로의 순간”을 의식적으로 가졌거나 아니면 주어진 환경으로 말미암아 “홀로의 시간”들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주전주후를 막론하고 헤아릴 수 없을만큼 “홀로의 시간”을 바르게 잘 이용하신 인물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예를 들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철학자들과 세계 종교 창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후대에 이모저모로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들도 예외없이 그들 각자의 “홀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홀로”의 기간이 순간, 몇 시간, 40일, 몇 년, 아니면 한평생이었든 관계없이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있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홀로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홀로의 시간”이란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홀로의 시간” 중에도 삶을 회피하려는 참되지 못한 병적인 도피형 “가출”이 있기도 하지만 참 삶의 길을 추구함에서 오는 “출가”도 있었습니다. 이 출가의 시간이야말로 반드시 있어야 할 인생 “필수품”입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만 벌면 다 될 것이지 “왜 그 ‘홀로의 시간’을 꼭 가져야만 하는가?”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괜히 비싼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쓸데없는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힐 가능성도 있겠고 또 머리인지 아니면 “대가리”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핀잔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참 삶의 길이 저절로 발견될 것인데 억지로 고독 속에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반문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살다가 보면 주어진 인간의 운명 때문에 홀로 남든 가 아니면 홀로 떠나고 말 것인데 억지로 얼굴에 주름살을 더 만들어 평생 살 것처럼 “도”를 닦는 척 심각함을 보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기야 “도닦”는 척 남까지 속이면서 돈을 버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이 있는 것만도 사실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홀로의 시간” 안에서 용솟음쳐 올라오는 진솔한 질문들을 무시하면서 한평생 겉으로는 버젓하고 문제없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옳은 짓인지 자문자답 해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돈만 있으면 하나님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이 세상이라지만 본질적인 홀로의 시간을 일부러 피해가다가 피땀 흘려 번 “돈”이 “독”으로 변해 버리는 경험을 가지신 분들은 - 속에서 올라오는 “이게 전부인가?”란 질문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또 돌고 돌아야만 하는 “돈”을 “어떻게 바로” 돌릴 수 있을까 도와주는 - “홀로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로구나 이미 깨닫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홀로의 시간에 영혼의 탐색으로 진솔해질 수 있는데도, 일상 생활에만 더 집념하면서 “영혼의 질문”을 참되지 못한 “믿음”으로 억누르거나, 잊으려 하거나, 아니면 그 질문의 해답을 “간이 식당”에서 쉽게 찾아 만족하려고 일부러 “홀로의 시간”을 피하려 하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돈 방석에 앉아있으면서도 알게 모르게 이미 소유하고 있는 “복’’들이 “진짜 영혼의 자양분인가?”란 질문이 모르는 사이에 “활화산”처럼 튀어나와 “한숨”을 쉬게 합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과거의 해결책이라 불리던 “도덕” “윤리” “철학” “종교”도 “나-홀로의-시간”속을 걸러서 여과하지 않고는 다 인공적으로 가미된 군더더기란 것임이 발각되고 있는 시기입니다.
인간 역사 이래로 양적인 소유만으로 풀 수 없었던 “한”의 소리가 바로 “오호통재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라는 인간 본연의 소리이며 인간 실존의 현주소 입니다.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한 풀이”를 시도해 보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시도 중에 저의 관심을 끌게 하는 하나가 전통적으로 주어진 해답에 애착이나 집착을 하는 것이 허망된 짓임을, 누구도 아닌 삶 자체가 가르칠 때,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의 큰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홀로의 시간,” 아니 군중 속에서라도 “홀로의 시간”을 가짐으로 겉치레로 주어진 “답”으로 횡포를 자행하는 “군중”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된다는 시대입니다. 우선 순위는, 의심가는 “가공된 식품”인 해답을 구입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용솟음쳐 올라오는 질문을 억제하지 않고 “토해보라”는 것입니다. 올라오는 질문이 몸 맘과 혼연일체가 되지 않으면 참 해답이 솟아 오를 수 없겠지만, 설령 솟아 나온다 해도, 분열된 “자아”로 말미암아 변질된 것이고 또 변할 것이라 합니다.
변질한 “진리”는 독입니다. 질문이 순수하고 진솔하고 진실해지면 그 순수한 질문 속에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는 “감격이 넘치”는 신선한 생명수가 이미 주어진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정신 건강의 시작은 각자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질문이 순수해질 때까지 수시로 질문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것이 절대자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합니다.
독자 여러분! “홀로의 시간”에 독자 여러분 각자의 실존적 질문이 무엇이든 (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무엇이며 누구인가? “그날”이 언제인가? 어떻게?) 100% 진솔하고 진실해지도록 “답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질문하는 즐거움을 가져 보시기를 바라면서 필을 놓습니다. 질문 없는 해답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짜입니다. 저 자신이 가지는 “홀로의 시간” 후에는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뿐만 아니라 차의 향기조차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과 향기”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 오현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