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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Lumbee 부족, 연방정부 인디언 인증 추구 130년 - 아직도 못 받아

인디언 부족으로 공식 인정해 달라

 

(노스 캐롤라이나 랄리, nc한국인뉴스) Young Lee =

노스 캐롤라이나(NC) 인디언 Lumbee 부족이 연방정부로부터 인디언 인증(federal recognition)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도 정식 인증을 받지 못하고 있다.

 

130년 동안 인증을 기다리고 있다. NC의 럼비 부족은 미 미시시피 동쪽 지역에서 가장 큰 인디언 부족이다. 현재 약 55,000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NC 남동부 해안 일대의 평원이 지난 수백년이래 자신들의 고향이자 터라고 생각하고있다.

그러나 연방정부에게 이들은 단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인디언 부족일 뿐이다.

 

공식으로 인디언 인증을 주지 않고 있다. 노스 캐롤라이나 서부 스모키 마운틴 지역의 체로키 부족처럼 럼비족에겐 인디언 보호구역도 없고 번쩍거리는 카지노도 없다.

 

대신 동부해안에 이르는 U.S. 하이웨이 74번을 따라 가다보면 럼비 카운티에 이르는데 - 여기서부터 럼비 테리토리라 불리운다 - 이 하이웨이가 ‘아메리칸 인디언 하이웨이’ 라고 이름 붙여진 것을 알아채릴 수 있을 뿐이다.

 

이 지역 중심 도시인 펨브로크(Pembroke)에는 거북 등 모양의 한 빌딩이 있는데 그 안에 럼비 부족 사무실이 있다.

 

이 도시에는 UNC-Pembroke(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가 있다. 1887년에 아메리칸-인디언 교사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가 전신 (前身)이다. 하이웨이를 따라 남쪽으로 더 내려가다보면 ‘헤이즈 폰드 전적지(Battle of Hayes Pond)’ 란 사적史蹟안내 표지가 보인다.

 

1958년에 쿠 클락스 클랜(KKK, 백인우월주의단체)이 백인 사회로의 진출을 막기 위해 럼비족을 혼내주기 위해 겁박을 하다가 오히려 럼비족에 패배한 전적지이다.

 

로빈슨 카운티를 통과하는 럼버 강(Lumber River; 럼비는 럼버강의 옛날 이름이라고 한다)의 이름을 딴 이 지역의 럼비 인디언 공동체는 1725년에 처음으로 문서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럼비족의 인디언 부족 정통성에 대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미 연방정부로부터 공식 인디언 인증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럼비족은 스스로 시우안, 알로키안, 이로키안 부족의 후예라고 말하고 있다.

 

럼비족의 인디언 정통성에 대해서는 적지않은 이론이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럼비족이 1587년 노스 캐롤라이나 동부 해안 로아노케 아일런드에서 갑자기 사라진 ‘잃어버린 콜로니’ 지역에 살던 후예라고 한다.

 

한 유력한 이론은 이들이 시우안(Siouan)족과 체로(Cheraw)족의 혼혈 후예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1750년까지 로빈슨 카운티에 모여들어 자리를 잡았다고 말하고 있다.

 

펨브로크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UNC-Pembroke)의 고고인류학 교수 스탠리 닉은 남아있는 유물을 토대로 이런 저런 부족들이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인디언들은 유럽 이민자들의 침입으로부터 도망하여 이곳에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 멸종하는 소수 인디언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합류하여 공동사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할 수 없이 영어를 쓰고, 유럽인 스타일의 복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 즉 살아남기 위해서 -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서로 부족을 이루었다고 한다.

 

스탠리 닉 교수는 중요한 것은 “이곳에 그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라고 말했다.

 

<2급(Second-class) 인디언>

 

럼비족은 1888년부터 연방정부의 인디언 인증을 추구해 왔다. 인증은 공식적인 법적 지위이다. 인디언 법적 지위을 인정받으면 주권국가처럼 자치정부를 구성할 수 있고, 연방정부로부터의 혜택 - 예를 들어 학교 건축 및 운영 비용, 의료 혜택 등 - 을 지원 받을 수 있다.

 

럼비족은 1956년 제한된 인증(federal limited recognition)을 받는데 그쳤다. 왜냐하면 반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많은 노스 캐롤라이나 정치인들이 공식 인증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수포에 그쳤다. 로빈슨 카운티 인구 중 41%는 럼비족이다.

 

로빈슨 카운티는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가장 가난한 카운티이다. 현재 럼비족은 21명의 부족 카운슬 멤버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

 

부족 헌법은 2001년에 채택되었다. 5명으로 구성된 부족 재판소가 내부 문제에 한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정식 연방 인증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연방정부의 지원은 받지 못하고 있다.

 

<연방정부 인디언 인증>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들은 연방정부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토지를 정부에 양도한 후에 인증을 받았다. 그러나 동부 지역의 많은 인디언 부족들은 단순히 유럽인들의 침입으로부터 도망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유럽 백인들의 눈에 이들은 거의 눈에 띄이지 않았고, 그 결과 기록도 별로 없다.

 

럼비 부족의 공식 인증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서부 스모키 마운틴 지역의 체로키족의 반대에도 기인하고 있다.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유일하게 인증 받은 체로키족은 럼비족이 인증을 받으면 카지노를 개설 할 수 있게 되어 자기들 카지노 사업에 경쟁이 된다고 보고 있다. 체로키족은 카지노 등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부족 1인당 연 $12,000씩 지원하고 있다.

 

체로키족은 1838년에 미 연방정부가 그들 지역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들 지역을 고수해 왔다.

 

***헤이즈 폰드 전투(Battle of Hayes Pond):

1954년 미 연방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흑백분리정책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백인우월단체 KKK는 미 남부 전역에서 테러를 자행했다.

 

사진: 럼비족이 라이플 등을 들고 KKK 단원을 둘러싸고 있다. 1958년 1월 18일.

 

한편 로빈슨 카운티에 거주하는 럼비족이 1956년 미 연방정부로부터 한정된 인디언 부족 인증을 받자, 당시 KKK의 지도자 제임스 콜은 럼비족을 단지 흑인피가 더 많이 흐르는 혼혈인종으로 치부하였는데, 이들이 인디안 준(準) 인증을 받자 향후 이들의 다음 단계는 백인 인증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KKK는 럼비족이 사는 지역에서 이들을 겁주기 위한 켐페인을 시작했다. 이들을 이 지역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여 묶어 놓겠다는 목표였다. 이들이 이 지역 밖으로 나오면 백인들과 피가 섞인다는 것이다.

 

KKK는 전쟁을 선포하고 럼비족이 사는 마을에 들어가 십자가를 태우고, 백인과 데이트를 하고 있는 럼비 부족 여성을 위협하고, 럼비 부족이 다니는 주점 앞에 십자가를 태우고, 럼비족 남성을 폭행하는 등 겁박행위를 했다.

 

1958년 1월 18일 급기야는 50-100여 명에 이르는 KKK단원이 럼비족이 사는 곳의 한 공터에 커다란 마이크 장치를 설치하고 십자가를 세우는 등 인종분리 지지 모임 준비를 하였다.

 

이를 인지한 럼비족은 500여명이 돌, 몽둥이, 무기 등으로 무장하여 이들을 공격하였다. 총격으로 KKK단 4명이 부상당했다. 결과는 럼비족의 승리였다.

 

KKK는 지역 여론에 호소했지만, 지역 언론, 정부, 주민들은 KKK에 등을 돌렸다. 이후 이 사건은 KKK 지도자 제임스 콜이 폭동 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럼비족은 이날을 ‘헤이즈 폰드 전투’ 승리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잃어버린 콜로니(Lost colony: 1585-1590):

로아노케 콜로니(Roanoke Colony)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첫 영국인들의 영원한 식민 정착지로 1585년 여름에 로아노케 섬에 확립했다.

 

그러나 영국 본토로부터의 공급 물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게다가 현지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사이도 나빠 1년 후 잔류대 형식의 수십 사람만 남겨놓고 대부분 영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시 1년 후 1587년 7월 두 번째 원정대(대장 죤 화이트)가 도착했을 때 잔류대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들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1590년 영국 죤 화이트가 다시 이곳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잔류대의 흔적은 없고 다만 나무에 "CROATOAN”이라고 새겨진 단어만 발견했다.

 

후에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백년 동안 연구 및 조사를 했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인디언에게 모두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어떠한 유골의 흔적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지역 인디언들에 흡수되어버렸다는 구전(口傳)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인 1998년 크로아탄(Croatan) 부족의 근거지였던 해터라스 섬에서 인공물이 발견되었으나 연구자들은 이것들이 로아노케 콜로니에서 온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1590년 원정대가 발견한 나무에 새겨진 “CROTOAN”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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