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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영 칼럼 : 8.15 특집 기고- 8.15 빛과 그림자 - 희망과 분단의 서막

정태영 
전 UNCG Adjunctive Visiting Professor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길게 크게 보는 법과
짧게 자세히 보는법이다.

이른바 역사 해석 방법이다.

길게 크게 보는 법은 역사철학가들이 즐겨 사용한다.
반면 짧게 자세히 보는 법은 정통 사학가들의 방법이다. 랑케(독일 실증주의 사학자, 1795-1886) 이후의 과학적 실증주의 전통이 세워지면서 넓게 받아들여진 방법이다.

길게 크게 즉, 거시적으로 보는 사람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칼 맑스이다. 
그의 계급 사관이 대표적이다.
사관(史觀)을 갖고 역사를 해석하면 역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가치를 확립해 가면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랑케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후의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본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경험적 사실을 중시하고 가치 중립적이다.


한국의 역사를 길게 보면 
<고조선 - 삼국시대 - 통일신라 - 후삼국시대 - 고려 - 조선 - 일제 강점기 - 남북한 시대> 로 
도식화 된다. 
이렇게 도식화 하면 8.15는 해방의 기쁨보다 ‘분단’의 아픔이 두드러져 보인다.

한반도에서 마지막 통일 국가는 918년 고려가 이룬 것이다. 이후 조선으로 국호는 바뀌었지만 단일 국가로 거의 1천년을 지내왔다. 그리고 1910년 인접국에 흡수병합되어 국가가 소멸되는 역사적 수모를 당했다.
1945년 일제 지배하에서 해방되었고, 바로 2 국가가 탄생하여 우리는 현재 분단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1천년 만의 분단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역사를 짧게 자세히 보면 
<왕조 시대 - 공화국 시대(자유민주자본주의 대 공산사회주의)>로 
도식화 할 수 있다. 

한국은 8.15 해방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자유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오늘날 G 7(세계 최 선진국 모임)에 초청되는 경제강국의 지위를 얻었다.  단군 5천년 역사 이래 중국을 처음으로 제치고 첫 세계적 경제 강국이 된 것이다. 
(1인 GDP 기준)


1. 8.15의 역사적 의미

8.15를 어떻게 역사적으로 정의해야 할 것인가는 아직도 역사학계의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주어진 해방론’  ‘자율적 해방론’ ‘복합적 외인론’ 등을 거론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단의 시작’으로 봐야한다.

어쨌든 분단의 관점은 한반도 역사를 정치지리적 관점에서 조감한 것이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 내부 시스템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한민족은 극히 최근까지 5000년 전(全) 시대를 왕조 국가의 신민으로 살아왔다. 
세습 군주 밑에서 적당한 신분 차이를 이루며 살아 왔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1945년 8.15를 경계선으로 하여 왕조 시대에서 공화국 시대로 바뀐 것이다.
이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커다란 국가적 특징이다.
모든 국가 구성원이 평등한 권리를 갖고 스스로 지배자를 선출하는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이른바 서구식 민주주의이다. 


미국에서는 1776년 독립으로 쟁취한 것을 우리는 거의 200년이 지난 다음에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경제 시스템으로는 남북한에 각각 전혀 다른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남한은 자본주의가 도입되었다.
반면 북한은 전혀 새로운 개념인 공산사회주의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이런 점에서 8.15는 분단 시대의 시작점이며, 공화국 체제의 시작이며, 상반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시스템이 동시에 지리적으로 위치만 다를 뿐 한반도에 분점되어 도입된 시기였다.

2. 왜 분단인가? 그리고 왜 분단이 이리 오래 가는가?

8.15 당시 많은 사람들은 분단이 오래 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초기엔 38선도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블랙 스완(2007년)’을 써 유명해진 나심 탈레브는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썼다. 
레바논 출신인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레바논 내전 발발 당시 상황을  “내 주변의 어른들은 입만 열면 이 전쟁이 ‘불과 며칠이면’ 끝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실은 17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1960년대 쿠바에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서자 ‘며칠 있으면 돌아가겠지’ 하며 트렁크 반도 채우지 않고 마이애미로 피난 왔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 고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졌을 때 베를린으로 망명한 러시안들도 머지않아 귀국하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오류를 범하는 이유는 “희망에 눈이 멀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블랙 스완. The Black Swan. 2008년. 한국판 번역 54면)

분단의 원인으로 나는 외인과 내인을 든다.

• 외적 요인 -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의 산물
한반도의 국가 운명을 이해하는데는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 차원에서 먼저 이해를 해야한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항상 강대국 세력 균형에 영향을 받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는 평화시기가 아닌 변화기와 혼란기에는 더욱 영향을 받는다.

조선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거세진 제국주의 물결과 국제정치 질서의 희생물이다. 
일본의 야심과 교활함에 조선이 당한 것이다. 
서구 강대국이 못 본 체 했기 때문이다.

1885년 한국에서 한 사건이 벌어졌다. 
영국이 한국의 남쪽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작은 섬 거문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이다(거문도 사건). 


<
<1885년 거문도에 무단 침입한 영국 전함>

당시 조선인들은 그 연유를 몰랐다. 

왜 영국이 보잘 것 없는 남해의 작은 섬을 점령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였다. 

당시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영국이 팽창하던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영국과 러시아가 아시아 대륙에서 펼쳐지는 팽창과 봉쇄의 전선 즉, 세력 균형선은 
<흑해 크리미아 반도 (1854년 크리미아 전쟁에서 러시아의 남진 저지) - 아프카니스탄 – 한반도>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거문도는 러시아가 남진을 해야 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한일 해협 사이 남단에 위치해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실제로 1905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는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일본 함대의 공격을 받고 궤멸하였다. 결국 러시아는 극동의 조그만 나라 일본에 패배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에 일본과 영국은 동맹사이였다.

이러한 영국의 세계 전략은 영일 동맹 (1902년) -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영국의 우방인 미국이 일본과 맺은 비밀 각서,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권에 둔다는 양해) 등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배타적 권리를 묵인하였다. 

이것은 결국 한반도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일본에 합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합병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세계질서를 주도했던 영국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 역사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해 오던 중국은 서구 열강에 힘을 못쓰던 시기였다.

2차 세계대전으로 영러 대립은 미.소 대립으로 바뀌어졌다.
그리고 한반도에 미.소의 세계 질서 균형선이 그어졌다. 
그것이 한반도의 남북 분단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것은 약소국인 한국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강대국 중심의 세계적 차원의 문제이었기 때문에 한국으로선 분단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내적 요인 - 한반도의 사회주의 사상 유입과 좌우 대립
한반도 분단에 고착제 역할을 한 것은 사상과 이념이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잘못 되었을 때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시간’ 이란 말을 한다. 
한반도의 운명도 그랬다. 

1920년대부터 한반도에 전파된 공산사회주의 이념이 1945년 한반도 분단시점에서 만났다.
그 때 1945년 한반도에서 세력 균형 선이 재편될 때, 그 사상 갈등이 분단의 접착제로 작용했다.


필자는 평소에 1945년부터 1950년 6.25 전쟁 사이에 한국인들의 사고 방식이 어떠했을까 하는 점을 늘 궁금해해 왔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김종필(전 국무총리)의 증언과 김동길(전 연세대 역사학 교수)의 증언을 보고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김종필은 “당시 지식인 치고 사회주의 아닌 사람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라고 증언한 적이 있다.

그리고 김동길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해방 이후 당시 70%가 사회주의를 신봉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의 증언은 역사서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출판부가 1990년에 간행한 ‘한국사특강’에는 “여운형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다수의 지지기반을 가졌는데 미 군정이 이를 무시해 버렸다” 고 기술하고 있다(295면). 이어 “미 군정은 광범위한 대중 기반을 갖고 있던 좌익의 움직임에는 적대적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국사특강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296면)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여운형>

<그러면 왜 한국에서는 사회주의가 폭넓게 인민대중에 받아들여졌는가?>

한국에 사회주의 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전후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극동 지역인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1918년 이동휘(李東輝)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고, 이것이 1921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해방정국에서 중심 역할을 하게되는 여운형(呂運亨)이 이 조직에서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여 간도지방과 기타 지역에 배포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러시아, 중국의 한인들 사이에 각종 공산당 조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수용, 소개하면서 사상단체·비밀 공산주의그룹들을 조직하여 민족해방과 그들 이론인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

이 무렵 일간지와 정기 간행물에서는 유물사관, 소비에트 혁명정부와 레닌에 관한 기사를 종종 다루고 있을 정도로 넓게 퍼져가고 있었다.

朴殷植은 1920년 ‘獨立運動之血史’ 에서 “러시아 공산당은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고 제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하였다” 고 적고 있다.

동아일보는 1921년에 무려 73회에 걸쳐<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표제하에 그의 일생과 활동 및 볼세비키혁명 등을 연재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식민지 조선의 민족적·계급적 해방을 동시에 열망했던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이 형성되는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는 적고 있다. (신편 한국사 제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2003년).

<당시 한국 농촌 사회의 피폐상>

그러면 왜 공산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는가?

당시 한국 사회 구조와 농촌의 피폐를 보면 이해할 수가 있다.
한국은 조선 시대 이래 소위 ‘가렴주구 (苛斂誅求)’ 란 말이 상징하듯 하층민들은 상층민 즉 관료와 양반들의 전횡에 시달려 왔다. 
이러한 폐해는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되어 농민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왔다.

“1942년 당시 기준으로 한국민의 70% 이상이 농민이었다. 
그리고 농민의 80%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이들 소작농은 수확 곡식의 50% ~ 70%에 이르는 고율소작료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떤 곳에선 소작료가 80%에 이르기도 했다.” (한국사특강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296면)

이러한 농촌의 수탈 구조는 해방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즉 조선반도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뿌리를 내릴 수 밖에 없는 사회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상몰수 무상배부’란 공산사회주의자들의 토지개혁 선전에 농민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신편 한국사 제52권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2003년)

<전통적 국권회복 운동에 공산주의 사상의 대두 - 좌.우의 대립>

조선은 역사적으로 대륙의 강대 세력에 압박 받는 피폐를 다수 겪었다. 
그래서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외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임진왜란기의 의병들 - 구한말 시대 의병 - 동학 혁명 - 국권회복운동 - 3.1 독립운동으로 면면히 민족주의 자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기조에 1920년대부터 공산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이념 갈등이 빚어졌다. 

자유민족주의적 성향의 애국주의자들은 독립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를, 공산사회주의자들은 공산사회주의 국가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처럼 한국은 좌 우 분열 속에 갑자기 해방을 맞게 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

1945년 8.15 해방은 갑자기 찾아 왔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한국 내외소식에 비교적 밝은 사람들은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연합국도 마찬가지 였다. 1943년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곤 했었지만(카이로 회담 - 얄타 회담 - 포츠담 회담 등)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미국이 허겁지겁 38선을 제안한 것이 그 방증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최초 원폭 투하, 8월 8일 쏘련 대일선전포고 등 충격적인 사태의 진전에도 일본 군부 강경파는 여전히 필사항전을 거듭 주장했다. 

8월 14일 일왕 주재 ‘어전회의’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항복파의 의견은 3대 3으로 갈라졌다. 
결국 일왕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한다” 며 항복파의 편을 들어 결론을 냈다. 

그리고 다음날 8.15 낮 12시 일왕이 항복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발표함으로써 조선반도에 해방이 찾아 왔다.



한국 내부가 좌우로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미국과 소련이라는 전혀 새로운 강대국이 한반도에 등장했다.
한국 사회는 사상 이념적으로 해방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였다.

<8.15 해방 이후 정국  - 좌우 대립의 폭력화>

사상 대립은 당연히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지하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세력은 해방이 되자 지상으로  올라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좌우 대립은 과격한 폭력으로 발전했다. 
일련의 정치인 암살 사건이 이어졌다. 송진우(중도 우파), 장덕수(중도 우파), 여운형 (중도 좌파), 김구 (좌우 합작파) 등이 1946년부터 1949년 사이에 잇달아 피살되었다.

공산주의 조종을 받는 폭동 사건도 이어졌다. 
1946년 대구 폭동, 1947년 제주 4.3 사건, 1948년 여순 반란사건 등이 발생해 남한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6.25 전쟁의 발발 - 분단의 결정적 고착화>

북한의 남침은 소련의 승인, 중공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공산주의 팽창 전략의 산물이다. 
김일성(가운데 마이크 앞), 박헌영(왼쪽에서 두 번 째 안경 쓴 사람)이 모스코바에 도착하여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1949년. 
이들은 스탈린을 만나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승인을 요청했다.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세계의 공산화 즉 노동자(플로레타리아)들의 해방과 플로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한다. 
한반도의 적화도 그들의 세계 공산화 전략의 일환인 것이다. 

이들은 한반도에 드리워진 세력 균형선을 잠시 깰 수 있다고 오판했다. 
균형이 깨진 그 잠시 틈에 한반도를 점령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번 점령하면 되돌리기가 어려우니까...

전쟁은 언제나 오판에서 시작된다. 
독일의 2차 세계대전 도발도 영국에 대한 독일의 절대적 군사력 우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가 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전쟁을 먼저 시작하겠는가?
이점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도 적용되었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에서 미국에 대해 해군의 절대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한 것은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일본의 허리를 겨냥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전략상 즉, 태평양 지배를 방어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역이었다. 

즉 한반도가 공산화 되면 일본의 허리에 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은 형국이 되기 때문에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서 개입한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미국인들이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지만.
당시에 공산주의 팽창에 서방 세계가 긴장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는 미영의 러시아 남진을 봉쇄하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중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한 것은 한반도의 지정학 위치가 모택동이 말한 것처럼 ‘순망치한 (脣亡齒寒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이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서는 한반도에 적대 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한반도의 운명은 강대국의 국제 세력 균형을 떠나서는 가늠하기가 힘든 이유이다.

4. 향후 전망

지난 반 세기 동안 중국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급기야는 G2로 올라섰다.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한 미국의 대응은 치열하다. 
이러한 미중 갈등과 경쟁 고조는 한반도의 분단을 더욱 지속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것 같다.


중국 기관 매체인 <인민일보>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2020년 5월 28일 사설에서 미국이 중국의 홍콩 보안법을 비난하자 “미국이 중국을 위협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서구 열강이 중국에 간섭하던 시기는 지났다는 선언이다. 

의미 심장한 말이다.
한반도에서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은 <영러 대립 - 미소 대립 - 미중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 내부에서 남북 갈등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북한이 경제적 열세를 (핵 차원의) 군사적 우위로 상충하고저 하고 있다. 

남북한 간의 새로운 힘의 균형이다. 
남북한 균형의 뉴-모델이 정립되고 있다.

5. 맺으면서 - 사관

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조망하는 방법은 일목요연하고 간단명료하여 이해하기 쉽다. 
대중은 이에 쉽게 동조한다. 
그래서 선동적 정치인들이 흔히 사용한다.

그러나 이들의 심각한 오류는 “몇 가지 사실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 양 세계화 일반화” 해버리는 것이다.

맑스는 1848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작성한 ‘공산당선언’에서 수천년 인류역사를 간단히 2분법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라고 정의해 버렸다. 

이어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동업 조합의 장인과 직인, 요컨대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투쟁이다”고 선언하였다.


맑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헤겔(1770-1830)은 “역사는 자유와 이성(freedom and reason)의 전개 과정이다”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의 논리가 얼마나 먹혀 들어 가겠는가?

그러나 사상가는 어디까지나 행동이 없는 사상가이자 이론가일 뿐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항상 그것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이다. 

히틀러는 니체의 초인 사상을 이용했고, 레닌 스탈린 등 공산주의자들은 맑스의 이론과 사상을 이용했다.

대중들은 그러한 선동가들에 눈이 머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한계이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남한의 자유자본주의 덕분에 한국은 오늘날 번영을 누리고 있다. 



**주석: 필자는 서두에 실증주의 사학자들이 즐겨 역사를 짧게 자세히 보는 방법을 선호한다고 썼지만 이 의미는 필자의 서술을 강조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통 사학자들도 긴 역사를 일반적 시각에서 통찰하고 관통하는 역사 의식을 가지고 서술한다. 이른바 통사(通史, 제네랄 히스토리)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1998년에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그린스보로 캠퍼스(UNCG) 정치학과에 Adjunctive Visiting Professor로 재임하였다. 이메일: taeyung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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