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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간 아인슈타인(1)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1879년 독일 북부에서 발전기 공장을 운영하는 유대인이었던 아버지 헤르만과 독일인 어머니 폴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부모에게 지속적인 걱정을 안겨줬다. 태어날 때는 뒷머리가 너무 커서 기형아로 의심받았고, 뒷머리가 들어갈 무렵부터는 말을 하지 않아 벙어리가 아닌가 하는 걱정을 낳았다. 겨우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같은 말만 계속 되풀이하곤 했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다.

 

여섯살 때 학교에 들어갔는데 주위에 유대인 학교도 없고 또 아인슈타인 부모는 종교와 제례에 별 관심이 없어 아인슈타인을 카토릭 학교에 보냈다. 학급생 70명 중 유대인은 아인슈타인 한명 뿐이었다. 학교는 유대인이라고 특별히 차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모두가 반유대주의자였다. 이러한 환경은 그가 평생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느껴졌던 원인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학교를 싫어했고, 학교도 그를 우수한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은 교사가 수업 시간에 대못을 보여 주며 “이것이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했다.

<사진: 아인슈타인이 3살 때>

 

이러한 영향탓인지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사들에게 반항적인 학생이었다. 여기에 그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더해져 그로 하여금 당시의 독일의 군대식 일체 교육에 심한 거부감을 갖게 하였다. 그는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일어서! 차렷!” 하는 식의 교육방법을 싫어했다.

 

역사적으로 당시 철혈재상으로 불린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이란 역사적 위업 달성을 위해서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즉 철혈정책이 당시 독일 사회의 주조였고 다수 독일인들은 그러한 군국주의 정책을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던 시기였다.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엔지니어인 숙부의 영향으로 일찍이 수학과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 학교에서의 그의 과학과 수학 성적은 매우 좋았다.

 

어쨌든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도 싫었고, 당시 국수주의적 전체주의 독일 정책도 자유로운 정신활동을 원했던 그의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기에는 너무 유순했다. 의지는 강했지만 사업을 하기에는 온화한 가정적 인물이었을 따름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강한 성격이었다.

<사진: 아인슈타인 14세 때>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도록 했다. 아인슈타인은 처음엔 반복적으로 연습을 해야하는 기계적 훈련 때문에 싫어했지만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배운 후에는 달라졌다. 그는 모차르트의 순수하고 단순한 음률에 매료되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바이올린은 그를 따라다닌 평생 아이콘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은 그가 유명해진 이후에도 수준급 이상이었다.

 

1894년 아인슈타인의 부친은 사업이 실패하자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이태리로 이사를 갔다. 할 수 없이 아인슈타인은 홀로 뮌헨의 친척집에 머무르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독일의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독일을 떠날 결심을 하였다. 가까스로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이태리의 가족에 합류했다.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부모에 스스로 공부해서 대학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집에서 공부한 후 스위스로 가 취리히 폴리텍(10년 후 이대학은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으로 바뀌어졌다.)에 입학하려고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을 눈여겨본 학장의 배려로 취리히에서 30여 마일 떨어진 곳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하숙을 하였는데 주인집 가족들과 아주 친하게 되었다. 이후 개인적 인연도 많이 맺었다.

 

하숙집 주인은 역사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교사이었다. 그의 아들은 아인슈타인의 여동생과 결혼했고, 딸은 아인슈타인의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다. 아인슈타인의 첫 여자 친구도 이 집 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고등학교에서 공부한 후 1년뒤 1896년 10월 연방 공과대학교에 마침내 입학하였다. 이 당시 그는 독일의 권위주의와 군국주의적 분위기를 싫어해 1896년 독일 국적을 포기했다. 그는 대학시절에 4살 연상인 세르비아 출신의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 , 1875-1948)를 만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여자로서는 특별하게 김나지움에 입학허가를 받아서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수학과 물리학에서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줄곧 학교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물리학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며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 아인슈타인이 부모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부모는 반대했다. 처음 어머니에게 마리치의 사진을 보여주자 어머니는 가무잡잡하고 이지적이며 아인슈타인보다 3살이나 많은 그녀를 보자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며 “너와 같이 앞길이 창창한 아이가 그녀와 결혼하면 인생을 망친다.” 고 말했다.

 

친구들도 감각적이고 멋진 아인슈타인이 작고 선천적 장애 때문에 절룩거리는데다 고독감을 풍기는 세르비아 출신과 사귀는데 의아심을 나타냈다. 밀레바의 집안도 반대했다. 밀레바 마리치는 열정적이고 정력적이었지만 침울하고 우울한 성격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밀레바와의 사이에 첫 아이를 임신하게된다. 당시로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은 흔하지 않은 시대였다. 1901년 10월 밀레바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아이를 낳기 위해서 그들의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인 세르비아로 갔다. 태어난 아기는 리절(1902-1903?)로 이름지었다.

 

이 아이는 그 후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아인슈타인은 생전 이 아이에 대해 전혀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의 사후 30년이 지난 1986년에야 그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리절의 존재가 드러났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된 많은 전기학자들이 그녀의 존재를 탐문하기위해 세르비아 지방의 출생기록과 심지어는 묘비명까지 확인하면서, 그녀의 소재를 확인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전기학자들은 이 아이가 태어난지 이듬해 성홍열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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