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바스 위치 (루간스크, 도네츠크) 지도
우크라이나 전쟁 100일째인 지난 6월 3일 유럽연합(EU)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금지하는 제6차 대(對)러시아 제재안을 채택했다. 원유는 6개월 내에, 정유제품은 연말까지 단계적으로 수입이 금지된다. EU의 조셉 보렐 외교대표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의 90%를 중단하는 것은 푸틴의 군자금에 커다란 타격”이라고 평가했다. EU의 러시아 석유 제재는 이번 전쟁이 에너지자원 갈등이라는 요인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이 석유와 천연가스 때문이라는 분석은 개전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지난 2월 말 열린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토론회에서 우크라이나의 기후학자인 스베틀라나 크라코프스카는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가 화석연료에 의존하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면에서 뿌리가 같다”고 말했다. 미국의 기후전문 미디어인 ‘클라이미트’는 지난 3월 6일 “대부분의 화석연료 전문가들이 크라코프스카의 견해에 동의한다”며 “푸틴이 무엇을 추구하든 간에 그의 군사력은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로 움직인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푸틴의 모험주의 바탕에는 오일머니
미국 브라운대 기후연구소의 제프 콜건 국장은 “푸틴은 오일머니를 사용하여 국내 정치적 제약을 제거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로써 모험주의적 대외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푸틴의 러시아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 같은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강조했다. 콜건은 2013년에 출간한 ‘석유 침략(Petro-Aggression)’이라는 책에서 경제와 정부 예산을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들을 ‘석유국가(petrostate)’라 정의하고, 석유국가가 될 경우 비석유국가(non-petrostate)와의 충돌경향이 50%가량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경우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은 국내총생산(GDP)의 20%, 전체 수출의 60%를 차지한다. EU는 천연가스 수요의 35%, 석유 수요의 25% 등 에너지의 20%를 러시아에 의존한다. 덕분에 러시아 정부세입의 33%는 EU로부터 현찰로 유입된다. 푸틴으로서는 러시아 납세자들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큼직한 돈주머니를 갖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의 대외 침략은 고유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미국 덴버대학의 컬렌 헨드릭스 교수는 주장한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유가가 급상승한 1979년에 발생했다.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 유가가 급락하면서 소련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1991년에 결국 소련은 붕괴했다. 역사상 유가가 가장 높았던 2008년에 푸틴은 조지아를 침공했다. 세계경제가 불황에서 벗어나 유가가 급등하던 2014년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돈바스를 침공하고 크름반도를 병합했다. 2019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배럴당 37달러까지 떨어졌던 유가는 올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까지 고공행진했다. 러시아 재무장관은 지난해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한 덕분에 뜻하지 않게 많은 수입을 얻었다”고 말한 바 있다. 러시아 정부의 석유 및 천연가스 수출로 인한 수입이 당초 예상보다 51%나 늘어났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러시아는 화석연료 판매로 하루에 5억달러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석유국가들은 유가에 관한 한 위험이 클수록 보상이 크다는 계산을 하는 것 같다. 유가가 배럴당 20달러 수준으로 바닥을 친다면 푸틴이 지금처럼 전쟁을 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국내적으로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수입이 넘친다면 푸틴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침략이 유가를 더욱 높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지도자가 일시적으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헨드릭스 교수)
지난 5월 17일 러시아 석유산업 관계자들과 화상회의 중인 푸틴 대통령. 사진=뉴시스
유가가 급등할 때 푸틴은 전쟁 일으켰다영국으로 망명한 러시아의 전 올리가르히인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는 프랑스 TV 인터뷰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은 푸틴과 측근들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데 사용된다”고 지적했다. 푸틴으로부터 “석유 수입을 빼앗으면 특수기관과 경찰의 수가 유럽 수준으로 정상적으로 감소할 것이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에도 미국과 나토는 러시아의 석유 및 천연가스 부문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수입에 의존하는 유럽국가들에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말 배럴당 80달러였던 유가는 전쟁 직후 115달러로 급등했다. JP모건은 유가가 연말까지 배럴당 185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우크라이나 프라우다는 지난 6월 2일 러시아는 지난 4개월 동안 우크라이나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도 에너지를 팔아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티그룹 분석가들은 올해 러시아의 천연가스 판매 수입이 100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지난해의 2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전쟁 이후 세계는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금지를 추진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송유관을 통한 수송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러시아가 벌인 전쟁으로 인한 고유가가 러시아에 계속 도움을 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번 전쟁 직후 BP는 신속하게 250억달러에 달하는 러시아 로스네프트사의 지분 20%를 포기했으며, 최대의 유전 개발사업인 북극해 개발에서도 손을 뗐다. 셸은 가즈프롬과의 협력관계를 청산했다. 러시아에 40억달러를 투자한 엑슨모빌도 러시아를 떠난다고 선언했다.EU는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을 내년에는 3분의1가량 줄이고 이후에도 계속 줄여나가는 내용의 계획안을 마련했다. EU가 2006년부터 준비한 러시아 에너지 의존 축소 계획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당장 올해부터 EU는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미국의 LNG로 대체하고 있다. 미국으로부터의 LNG 수입은 지난해 220억㎥에서 올해는 150억㎥나 늘어난 370억㎥로 급증한다. 이는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수입량인 1500억~1550억㎥를 부분적으로 대체할 전망이다. 궁극적으로 EU는 2025년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 독립을 성취할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러시아 천연가스의 3분의1을 미국 등의 LNG로 대체할 예정이며, 재생에너지가 나머지 20%를 대체한다. 에너지 효율성을 높여 러시아 수입 에너지의 8~10%를 대체하고, 산업부문에서도 에너지를 절약한다는 계획이다.우크라이나를 지나는 석유·가스 파이프라인(푸른선)과 우크라이나 석유·가스 매장지역(주황색 지역). 러시아 에너지 벗어나려는 EU의 노력푸틴은 지난 6월 3일 러시아 TV1과 가진 전쟁 후 첫 인터뷰에서 “태양광, 풍력, 수소 등 대체에너지의 가능성에 대한 과대평가는 나쁜 일이다. 이러한 에너지는 질, 양, 가격 면에서 적절히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EU가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을 중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해석된다.푸틴에게 시베리아 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보내는 파이프라인은 막대한 현찰이 유입되는 국가의 젖줄이자 권력의 생명선이다. 러시아는 유럽 에너지 시장에서 차지하는 압도적 지분을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다. 반면 서구는 에너지원을 다변화하려 한다.
소련 붕괴 이후 서구는 카스피해 주변국에서 유전 개발을 시도했다. 카스피해 주변의 신생 독립국들인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는 480억배럴의 원유(전 세계 원유매장량의 3%)와 천연가스 292조㎥(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4%)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카스피해에서 생산되는 원유와 천연가스가 유럽으로 운송된다면 러시아는 유럽 에너지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을 일정 부분 잃게 된다. 러시아는 카스피해에서 생산되는 에너지자원이 유럽으로 수출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왔다. 결국 아제르바이잔만 미국이 지원하는 조지아와 터키를 지나는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이용하여 2005년부터 에너지를 유럽에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EU 수요의 2% 정도를 충당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정부 세입의 60%를 새로 얻게 되었으며,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푸틴은 2008년 8월 러시아인 보호를 명분으로 파이프라인이 지나는 인접국인 조지아를 침공하였다. 아제르바이잔에 이어 투르크메니스탄도 카스피해를 횡단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여 유럽으로의 수출을 도모했지만, 러시아는 환경보호를 명분으로 막고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와도 파이프라인 및 에너지개발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어왔다. 유럽에 수출되는 러시아의 원유나 천연가스의 80%는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파이프라인으로 운송된다. 2005년에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 정권이 들어서면서 러시아와 파이프라인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유셴코는 선거운동 중 얼굴이 심하게 변형돼 러시아 정보기관이 독살을 시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푸틴은 유셴코 정권이 파이프라인에서 대량의 원유를 빼돌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를 신뢰할 수 없다고 본 푸틴은 최대 고객인 독일과 100억달러를 들여 발트해를 지나는 파이프라인 노르트스트림2의 건설을 추진했다. 독일은 2017년 일본 후쿠시마 사태 이후 핵발전소 완전 폐기를 추진하면서 러시아로부터 도입하는 천연가스 물량이 급증했다. 하지만 독일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후 노르트스트림2의 승인을 철회했다.EU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량을 내년에는 3분의1가량으로 줄일 계획이다.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노르트스트림2를 건설하던 러시아 선박 아카데믹 체르스키호. 우크라전쟁 이후 노르트스트림2 건설은 전면 중단된 상태다/사진=뉴시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반전을 가져올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서방에 의해 확인된 것. 천연가스 매장량은 드러난 것만 5조4000억㎥로 노르웨이 매장량의 3.5배에 달한다. 주요 매장지역은 크름반도 주변, 동부의 돈바스를 관통하는 드니프로-도네츠크 지역, 그리고 서부의 카르파티아 등 3곳이었다. 드니프로-도네츠크 지역은 특히 앞으로도 상당한 양의 천연가스가 추가로 발견될 것으로 학자들은 예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는 유럽행 파이프라인이 있기 때문에 에너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 싼값에 유럽으로 공급될 수 있다. 당연히 서방 측 메이저사들이 신속하게 뛰어들었다. 셸은 2013년에 돈바스 유지우스카 개발에 100억달러를 투자했다. 셰브론도 서부에 100억달러를 투자했다. 우크라이나가 EU 회원국이 되면 유럽은 막대한 저장시설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된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 그러자 푸틴은 야누코비치에게 러시아 석유를 30% 싸게 공급해주고 150억달러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EU 가입을 보류시켰다. 그런데 2014년에 우크라이나에서 민주혁명이 일어나 친러 야누코비치 정권이 축출되었다. 새로이 들어선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은 다시 EU 가입을 시도하며 서구와의 협력을 재개했다.
푸틴은 2014년 3월 러시아인 보호를 명분으로 돈바스를 침공하고 크름반도를 병합하였다. 푸틴의 침공 이후 셸 등 서방의 메이저사들은 돈바스 유전개발 사업에서 철수했다. 그후 돈바스와 크름반도를 되찾으려는 우크라이나와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러시아 간의 무력충돌은 올 2월 러시아의 전면침공 직전까지도 지속되어 왔다.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원유와 천연가스가 EU로 수출되기 시작하면 러시아의 에너지산업은 판매시장을 잃는다. 국가 수입은 줄고, 푸틴도 빈털터리로 전락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는 ‘실존에 위협(existential threat)’이 되는 상황이 닥치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에너지가 EU에 수출되는 상황은 푸틴의 석유 및 천연가스 사업에는 그야말로 실존적 위협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공화국들 중에서는 가장 잘살던 나라였다. 소련 붕괴 당시에는 폴란드보다도 국민소득이 20%나 높았다. 2020년 세계은행에 따르면 1인당 GDP가 폴란드는 1만5721달러로 성장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3727달러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집권 이후 우크라이나는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IT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자원까지 본격 개발하면 부유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현재 푸틴의 러시아는 유전지대인 동부의 돈바스 지역과 남부의 크름반도를 장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이 지역을 양도하면 당장은 평화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부(富)의 원천을 푸틴에게 상납하고 자손 대대로 가난한 농업국가로 남겠다고 굴복하는 꼴이 된다. 두 나라 간의 에너지자원 갈등은 전쟁이 끝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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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2-06-19 20:1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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