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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교향곡 운명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년 ~ 182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22세 때 음악도시인 오스트리아 빈에가 거기서 평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질곡으로 이어진 한 평생이었다. 지독한 어려운 삶을 살다가 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길이 빛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는 결코 운명과 불행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그의 삶과 운명을 개척해 나간 인간 승리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아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에 닥친 시련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싸울 용기를 갖는다. 고통에 괴로와 하는 사람들에게 베토벤의 삶과 음악은 구원의 신이 되고 있다.

 

nc한국인뉴스가 그의 음악을 이번달에 추천한 이유이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 출신의 음악가로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프린스 이렉터의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들어가 후에 악장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아들 요한 판 베토벤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궁정의 수석 요리사의 딸인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와 결혼하였다.

 

할아버지의 지위 덕분에 베토벤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세 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는 아들을 이용해 돈을 벌기로 마음먹고 네 살 밖에 안 된 베토벤을 방에 가두어놓고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게했다. 그리고 2년 뒤인 여섯 살때 베토벤은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열한 살 때 가정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둔 베토벤은 12살 때 궁정 예배당으로 들어가 연주자로 일하면서 동생과 부모를 먹여살려야 했다. 17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더욱 심각해졌고 베토벤은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 베토벤은 빈으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하이든을 처음 만났다. 베토벤의 음악 천재성을 알아챈 하이든은 베토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음악을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이미 거장이었던 하이든은 느긋한 성격이 되어 베토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후에 베토벤은 그의 조급한 성격도 원인인듯하지만 어쨋던 "하이든에게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그를 떠났다. 그는 점점 명성을 얻어가자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여 팔았다. 다행히 어떤 때는 작품 하나를 팔아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한번은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왕에게 헌정하였는데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담뱃갑을 주기도 했다.

 

1796년 26세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에는 다시 프라하로 여행하였는데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청력이 떨어지자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지금도 나팔 기구 등 베토벤이 사용한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베토벤이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의 사망 후 부검 결과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때 이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결과 일반인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 이로써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중독임이 밝혀졌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49세가 되자 베토벤은 귀가 완전히 먹어서 의사소통을 하기조차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장애에 맞닥뜨렸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전보다 몇 배, 몇십 배 노력하여 이 시기에 '교향곡 제5번 운명', '교향곡 제6번 전원',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등 손꼽히는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그중에서도 걸작 중의 걸작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교향곡 '운명'은 베토벤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운명'의 네 악장은 작곡가 자신의 삶을 축약해놓은 듯,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운명을 그린 1악장에 이어 경건한 기도로 마음을 달래는 2악장, 인생에 대한 풍자를 그린 듯한 3악장을 지나 4악장에서는 운명을 극복한 승자의 환희를 그리고 있다.

 

베토벤은 귓병의 악화와 조카와의 불화로 점점 건강이 나빠지더니 56세에 결핵에 걸렸고 이듬해인1827년 3월 간경변증으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무려 2만여 명의 조문객들이 참석하여 위대한 음악가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그의 관을 맨 사람들 중에는 슈베르트도 있었다. 대표 작품에 교향곡 아홉 곡(운명, 전원, 영웅, 합창 외)과 피아노 소나타 '열정', '월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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