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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지문 등 ‘과학수사시대’ 열어… CSI드라마가 쏟아져 나와
최고의 미식축구 스타에서 살인자로 추락
‘살인자와 무혐의’의 흑백 갈등을 다시 일으킨 사건
1994년 6월 13일 월요일 0시 9분. 로스 엔젤리스에 최고급 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주택가 브렌트우드 콘도미니엄에서 한 개가 요란하게 짖으며
이웃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개 주인 스크루 보즈테페(Sukru Boztepe)가 밖으로 나와
개를 살펴보았다. 개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몹시 흥분해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보즈테페는 개가 이끄는 곳으로 달려갔다. 근처에 한
콘도미니엄 입구에서 개가 머물렀을 때 그는 너무나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다.
전처와 애인 로널드 골드만, 난자당해 주택가에서 죽은 채 발견
<언론에 포착된 OJ 심슨과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니콜 브라운 심슨과의 다정한 모습>
한 남자와 여성이 피가 낭자한 채 죽어 있었다. 특히 여자의 애인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온몸이 난자당한 채 발견됐다. 수십 곳 이상 칼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
너무 놀란 보즈테페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며 911로 빨리
전화하라고 소리쳤다. 경찰이 달려와 현장을 통제했다.
살해된 여자는 당시 가장 유명한 풋볼 선수 오제이 심슨(O.J.
Simpson)의 전처인 니콜(Nicole Brown Simpson)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같이 살해된 남자는 당시 25세로 그녀의 연상의 애인 로널드
골드만(Ronald Goldman)으로 밝혀졌다. 세기의
사건인 ‘OJ 심슨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내 살해 혐의로 기소됐다가 재판 끝에 무죄를 선고받은 전 미국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이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프로풋볼 명예의전당 회장 짐 포터는 4월 11일 발표한 짤막한 성명에서 심슨이 전날 암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포터 회장은 심슨의 전립선암 진단이 약 두 달 전에 공개됐으며, 그가
이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고 덧붙였다.
심슨은 전처 니콜 브라운과 그의 연인 론 골드먼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오랜 재판 끝에 형사상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건 자체는 미제로 남아 있었다.
'세기의 재판'으로 불린
이 재판은 미국의 엄격한 증거주의 판단 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인종차별 등 숱한 사회적인
문제도 제기했다.
<1995년 형사 재판 중 사건 현장의 증거로 제출된 피 묻은 장갑을 끼어 보이는 OJ 심슨의 모습. 그러나 검찰은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사건의 용의자가 당시 유명한 풋볼 선수로, 인기 있는 방송가로, 영화배우로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만큼 언론의 취재경쟁도 치열했다.
방송사상 최대 인원이 동원된 사건이다. 심지어 범죄사건에서는 전례가
거의 없던 재판과정을 비롯해 심슨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는 등 취재경쟁이 너무 치열했다.
용의자로 몰리자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도주하는 심슨과 그를 쫓는 경찰의 추적경쟁은 물론, 심슨을 쫓는 헬리콥터의 움직임도 생중계됐다.
해설자들은 심슨의 스포츠카의 성능이 뛰어나고 레이싱(racing) 기술이
너무나 뛰어나서 경찰차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등 실제상황과 픽션을 혼동할 정도의 이야기들을 늘어 놓기도 했다.
마치 각본에 짜인 수사 드라마나 영화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심슨이 모습을 보일 때마다 무려 2천500여
명이 넘는 신문과 방송 관계자들이 현장에 출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자 회견장은 언제나 만원이었고 거기에다 팬까지 몰려와, 취재현장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언론의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유명한 인사가 연루된
유명한 사건이다. 그때 까지만 해도 일반 사람들은 DNA지문이
무엇이며,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과학수사가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확실히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왜냐하면 상대가 심슨이라는
유명한 상대인만큼 수사당국은 과학수사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또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할 정도로 유명한 세기의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CSI(criminal scene
investigation, 범죄현장수사)가 드라마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과학수사를 배경으로 한 각종 CSI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면서
안방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마이애미 CSI, 뉴욕 CSI도 모자라 시애틀 CSI, 시카고 CSI 등으로 확대되었다.
배심원제도의 문제점, 흑백갈등 여전히 드러나
그러나 과학적 증거가 없다면 무죄다. DNA 과학은 심슨의 손을 들어주었다. 항간의 이야기처럼 돈으로 DNA 과학을 살 수는 없다.
돈이 궁핍한 심슨은 몇 백 달러에 이르는 세금도 못 낸 채 법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다는 외신도 전해왔다. 왕년의 화려한 스타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의 전처와 애인을 마치 자신이 정말 죽인 것처럼 픽션을 만들어 보자는 출판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론의 반대로 돈 벌 기회가 무산됐다.
이 제안을 원래 했던 사람은 바로 미디어 황제로 이름난 뉴스코포레이션의 루퍼트 머독 회장이다.
스포츠 갑부에서 완전 알거지로
심슨이 결국 무죄로 판결 나자 흑인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백인들은 분노했다. 배심원제도의 문제점과 고질적인 인종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미국 사회가 흑백 간의 갈등 속에서 끝없는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심슨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유명 변호사들로 이루어진 ‘드림팀 변호인단’의 승리라는 해석도 제기됐다. 돈으로 이겼다는 지적도 많았다.
비록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때는 ‘TV 광고에 가장 적합한 흑인 스타’ 심슨의 이미지가 구겨질대로 구겨진 뒤였다. 민사소송에서 패해 무려 2천만 달러에 이르는 배상금을 냈다.
변호사 비용 등 재판에 소요된 경비로 화려했던 과거는 온데 간데 없다. 완전 빈털터리가 됐다. 그리고 탈세혐의까지 받으면서 견디기 힘든 처지였다.
“살인을 생각하는 것과 살인을 하는 것은 천양지간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미세한 먼지만큼의 차이도 없다.” 범죄 심리학자의 이야기다.
심슨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며 모든 것이 완벽했고 행복했다. 더구나 방송인, 배우로 인기절정에 서 있던 그가 과연 전처와 그 애인을 죽여 자신을 파탄 낼 필요가 있었을까?
사랑을 둘러싼 애증의 그림자는 늘 잔혹한 결과를 생산한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OJ 심슨에게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세기의 사건’, ‘세기의
재판’으로 얼룩졌던 ‘OJ 심슨 사건’의 주인공 심슨은 이승을 떠났다. 이제 역사 속에서 조금 기억될 뿐
대부분의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도 거의 잊혀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