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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 형제는 드러머(drummer; 세일스맨)로 남부 돌아다니다가 텍스타일 산업의 번성 가능성을 알아챠려...
그리고 그 중심지로 그린스보로를 꼽아 정착 - 그린스보로는 당시 남부와 북부를 이어주는 요충지
그러나 후손들은 현실도 직시하지 못해 실패
"시대를 예감한자는 흥하고, 현재도 읽지 못하는 자는 망한다" 는 역사 교훈을 일깨워줘
Cone Mills은 그린스보로에 있었던 미국 최대의 면방직 회사로 면바지, 골덴 바지. 프라넬(면과 목화를 섞어 만든 직물), 기타 면 제품을 생산하는 20세기에 걸쳐 세계 최대의 면직물 생산회사이었다. Cone 가족의 역사는 18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해에 아버지 허만 칸(Herman Kahn; 1828–1897)은 미국에 이미 가 있는 여동생 가족과 합류하기 위해 고향인 독일 바바리아 지방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자 스펠링을 바꿔 성을 미국식으로 Cone 이라고 고쳤다.
허만 칸은 처음엔 테네시에서 식품과 옷, 구두 등을 파는 잡화 가게를 운영했다. 남북 전쟁 전 당시 남아 있는 인구 센서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허만 칸 가족의 재산은 $29,365으로 당시엔 상당한 재산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시작되자 비지니스를 처분하고 대신 얻은 현금을 부동산에 투자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부동산을 처분하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후 벌티모어에서 1870년에 식품 및 잡화 도매상을 열었다. Cone Mills의 설립자인 모세 콘(Moses Cone)과 시저 콘(Ceasar Cone)은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지역 소매상들로부터 주문을 받기위해 남부 지방을 여행했다.
<사진: 아버지 허만 콘은 11남매 두었다. 왼쪽이 장남 모세 콘(Moses Cone; 1857-1908). 51세에 폐수종으로 사망하였다.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했다. 오른쪽이 차남 시저 콘(Ceasar Cone; 1859-1917).>
당시에는 현금이 매우 귀해 주로 물물교환 형식의 바터로 장사를 했다. 면화와 옷을 바꾸고 상품 대금을 갚지 못하면 땅을 포크로져 하여 부동산을 취득하였다. 이들은 남부 지방을 다니며 면방직 산업이 장차 크게 번성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성기 때의 레보루션 밀의 공장 내부>
그리고 바로 면방직 제국의 건설에 착수했다. 두 형제는 1887년 애쉬빌에 격자무늬 천을 생산하는 한 공장에 파트너로 참여하여 $5만을 투자했다. 이후 이들은 점점 사업을 확장하여 1895년 그린스보로에 첫 면바지 생산 공장을 건설했다. 이들이 그린스보로를 면방직 제국의 본부 및 출발지로 삼은 것은 그린스보로가 남부 목화 생산 지대와 가깝고 아트란타-샬롯-워싱턴-뉴욕을 잇는 철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생산품을 뉴욕 등 대도시에 팔기에 적합한 지리적 여건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계속해서 공장을 확장해 나갔고 1899년 그린스보로에 레보루션 밀을 지었는데 당시로선 생산방법이 혁신적이어서 공장 이름을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1908년에는 이미 이들 공장은 세계 최대의 면방직 공장이 되어 있었다. 이들 제품은 튼튼하고 질긴 면바지로 명성을 떨쳤다. 1908년 맏형인 모세가 죽자 동생 시저가 회장자리를 이어받았다.
1917년 시저도 죽자 그 밑의 동생들이 사업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1951년 뉴욕 증시에 상장되었다. 형제들의 1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1956년엔 시저 2세가 사업을 이어받았다. 1983년에는 21개 공장에 10,800여명을 고용했다. 그러나 이후 1990년대 초부터 이윤이 줄고 저임을 쫓아 개발도상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긴 경쟁자들에 의해 결국 제국은 2003년 끝내 파산을 선언하고 만다.
모든 자산은 W. L. Ross and Company에 매각되었다. 현재는 콘 덴님(Cone Denim)이란 이름으로 그린스보로에 남아있는 White Oak mill에서 고급 면바지만을 생산하면서 이름만 이어가고 있다. *1915년 부터 청바지의 대명사인 Levi’s(Levi Strauss) 상표의 청바지 원단은 물론 완제품도 콘 밀에서 만들었고 최근까지도 Levi's brand 501 jeans의 유일한 공급자였다.
*모세 콘 병원(The Moses H. Cone Memorial Hospital);
모세 콘 병원으로 불리는 이 병원은 535 병상을 갖추고 있다. 1908년 모세가 사망하자 바로 그의 부인에 의해 병원을 세우기 위한 기금 마련 작업에 들어갔다.
모세가 병원 설립을 위해 남긴 재산 관리 지침에는 "지불 능력이 없다고 해서 환자를 내치면 안됩니다.(No patient should be refused admittance because of inability to pay.)"라고 씌여졌다. 1947년 부인 베사도 죽자 그녀의 유산도 병원 건립 신탁 펀드로 상속되었고 실질적으로 병원을 세울 자산이 되었다. 1949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53년에 문을 열었다.